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온

부산을 대표하는 산,

그곳에서 '부산문화유산'을 찾아보는 답사기

「부산 산길 역사의 발자취 찾아서」

네 번째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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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과 복병산, 대일 교류의

공간에서 식민지 근대의 이면까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4 코스

초량왜관 동관 일대 ▶ 초량왜관 서관 일대

▶ 용두산공원 부산타워 ▶ 미술의 거리 ▶ 부산근현대역사관

▶ 40계단, 인쇄골목 ▶ 중구 문화원 ▶ 부산기상관측소

▶ 복병산 배수지▶ 조선키네마 터



코스 4ㅣ용두산과 복병산,대일 교류의

공간에서 식민지 근대의 이면까지

조선시대 용두산과 복병산 일대는 일본인 마을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개항 이후에는 이 지역이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되면서 근대도시 부산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원(原)도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용두산과 복병산의 답사는 도시로서의 부산의 역사성을 찾는 실마리가 된다.

용두산 일대 초량왜관의 흔적

근대도시 부산의 탄생

관수가/부산부청 정문 앞 계단의 현재 모습

왜관 관수가에서 부산부청으로 또 요정에서 모텔로

언젠가부터 원도심이라 부르는 곳, 부산 중심에 자리한 행정구역이라 해서 중구로 명명된 곳이다. 근대도시 부산은 옛 초량왜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초량왜관은 산이라 부르기에 다소 민망한 해발 69m의 용두산을 한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조성되었다.

초량왜관의 중심건물이자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었던 관수가는 왜관의 책임자인 ‘관수’의 집무공간인 동시에 거주공간이었다. 개항 이후에는 이곳에 부산영사관과 부산이사청 그리고 부산부청이 차례로 자리했다. 정문으로 가면 관수가/부산부청 대문으로 올라가던 계단이 보이는데, 난간석과 경계석을 비롯하여 거의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한성1918 부산생활문화센터 지하층에는 매립 이전에 쌓은 옛 축대가 남아있다

동관의 주요 건물 개시대청, 재판가, 동향사

개시대청에서 혼마치 길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재판가가 있었다. 재판가는 외교와 교섭을 담당하던 일본 관리 ‘재판’의 집무공간이

자 거주공간으로, 지금의 타워힐호텔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판은 이름만 보면 오늘날의 법원을 떠올리겠지만, 사법적 의미가 아니라 조선과 일본 양국간 외교 현안을 해결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동향사는 사찰이었지만 왜관을 통과하는 모든 외교문서를 이곳에서 공식기록으로 작성하고 보관했다. 동향사의 승려는 관승으로서 한문에 능통하고 문장력이 뛰어나 전통적인 승려 역할 외에 외교문서를 다루는 중요한 일을 맡았다.

서관 삼대청 육행랑과 PIFF광장

서관 삼대청으로 불리던 동대청·중대청·서대청과 육행랑이 있었고, 국제시장 일대는 넓은 초지로 남아있었다. 원래 용두산과 그 서쪽으로 수풀과 억새가 우거져 있어서 오래전부터 이곳을 초량草梁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곳에 설치된 왜관 이름이 초량왜관인 것이다.

부산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공원

용두산 공원

용두산공원비(좌), 부산타워(중), 부산시민의 종(우)

남산 조선신궁 버금가던 용두산 신사

바다에서 보면 산세가 흡사 용의 생김새여서 왜관을 드나들던 일본인 혹은 고기잡이 나간 조선인들이 용두산이라고 부른 듯하다. 용두산은 본디 복병산·보수산과 이어져 있었으니, 아마도 용두산이 용의 머리이고 복병산과 보수산이 몸통일 터.

용두산 중턱에는 1678년 왜관이 조성될 때부터 왜인들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며 지은 신사가 있었다. 용두산 신사는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일본 신사인 셈이다. 교역을 하러 왜관에 와서겠지만, 이곳엔 재물신인 변재천을 모셨다고 한다.

개항 후에는 일본 거류민들의 기부금을 모아 거류지 신사로 고쳐지었고, 1910년대 다시 지금의 부산타워 일대에 크게 증축·이전하여 용두산 신사로 이름을 바꿨다.

용두산 대화재와 우남공원

해방 후에도 용두산 신사는 일본으로 귀환하려는 일본인들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예외적으로 존속했다. 하지만 1945년 11월 17일 한 개신교 신자가 신사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밀려온 피란민들에 의해 용두산은 판자촌을 이루었다. 1954년 12월 10일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용두산의 자랑인 울창한 소나무 숲도 홀라당 다 타버렸다. 경남도지사와 부산시장은 용두산 신령과 부적의 힘을 빌려서라도 화재를 막으려 1955년 정월대보름에 화재예방비를 세웠다. 특이하게도 화재예방비 옆에 안중근, 민영환, 이준 열사의 이름이 새겨진 ‘충신보국비’가 있다.

1955년은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80세가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내무부와 부산시는 용두산 공원을 이승만의 호를 따 ‘우남공원’으로 고쳤다.

부산의 랜드마크 다이아몬드타워(부산타워)

용두산 신사 본전이 있던 자리에는 식민지 기억을 지우고 용두산을 새로운 장소로 만들기 위해 부산탑[부산타워]이 세워졌다. 1973년 전국체전에 맞추어 부산을 상징하는 등대와 불국사 다보탑을 형상화하여 당시 국내 최고 높이인 120m[해발 189m]로 건립된 부산탑은 오랜 세월 부산의 랜드마크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하지만 만든지 어언 50여 년이 지나면서 노후화로 인해 2021년 리모델링을 거쳐 부산다이아몬드타워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걸었다.

식민지 수탈과 외세 지배의 아픔을 딛고서

부산근현대역사관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내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미문화원 그리고 부산근대역사관

부산근대역사관은 일제 시기인 1929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대개는 동척이라 불렀다]는 ‘척식’ 즉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일제가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 농민을 지원할 목적으로 1908년에 설립한 국책 회사이다.

전국 각지의 토지를 강압적으로 매수하여 일본 농민에게 헐값에 넘기고 조선인에게는 높은 소작료를 걷어가는 등 조선의 토지 수탈의 선봉 역할을 맡았던 기관이었다.

한국은행 부산지점에서 역사문화복합공간으로 탈바꿈

부산근대역사관 바로 옆에는 한국 1세대 건축가인 이천승1910~1992이 설계하여 1963년 12월 28일 준공한 한국은행 부산지점이 있었다. 한국은행 부산지점[2002년 부산본부로 변경]이 50년간 이곳에 있다가 2013년 7월 문현금융단지로 이전하자 부산시는 부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역사문화복합공간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부산시는 2013년 9월 25일 부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제70호로 지정하고 시민공청회 등을 거쳐 2018년 3월 부산근대역사관과 한국은행 부산지점을 통합한 역사박물관 조성 계획을 확정하였다. 이후 ‘부산근현대역사관’이라는 명칭도 확정하였다.

동광동 길 따라 걸으며

원도심 주변부의 어제와 오늘

40계단의 현재 모습

피난살이 애환이 담긴 40계단

40계단은 외모 때문에 유명한게 아니라 그 속에 서린 의미로 인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인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진 별 의미 없

는 그저 평범한 계단이었다. 개항 이후 용두산 아래 바다가 북빈 매축공사 1902~1908로 메워지고, 복병산과 붙어 있던 영선산[쌍산]을 깎아 그 아래 바다를 또 메워1909~1912 너른 새마당이 만들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왔다. 무슨 대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단 열차에 몸을 싣고 전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쳐온 것이었다. 피란민들은 부산역 광장 정면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복병산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40계단 위의 복병산은 이내 피란민들의 판자집으로 빼곡히 뒤덮였다.

동광동 인쇄골목 모습

1980년대에 머문 듯한 인쇄골목

40계단 윗길[동광길]은 동광동 인쇄골목이다. 옛 혼마치[백산길]와 이어지지만 대청로가 가로막고 있어 시내인 듯하면서도 외곽인 애매한 지역이다. 그래서 중심지로의 접근성이 좋으면서 상대적으로 집세가 저렴하다.

1960년대 초 신우정판과 동양정판이 이 골목에, 그리고 자문정판이 옛 서라벌호텔 뒤편에 처음으로 문을 열면서 동광동 인쇄골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인쇄소들이 점포세가 싼 이곳에 하나둘씩 자리 잡기 시작하여 1970년 초부터 대거 이전해오면서 이 일대가 부산인쇄의 메카로 자리매김하였다.

적산가옥을 활용한 부산중구문화원

적산가옥 활용의 좋은 예 중구문화원

커다란 금고처럼 생긴 정체 모를 2층짜리 건물과 범상치 않은 양옥집 두 채는 일제 때 석유 팔아 거부가 된 부산의 ‘정유왕’ 다테이시 요시오가 1932년에서 1934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적산가옥이다.

해방 후 한 번의 소유자 변경을 거쳐 해표 식용유로 유명한 동방유량과 눌원문화재단의 설립자인 신덕균 회장의 소유가 되었다. 종류가 다르지만 다테이시도 기름회사 사장이고 신덕균도 기름회사 사장이니 집주인들이 묘하게 얽힌다.

옛 다테이시 가옥은 일본식 주택과 서양식 주택 두 채가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 지어졌다. 이 적산가옥을 얼마 전 중구청이 매입해 1년 넘게 복원 공사를 진행한 끝에 2021년 중구문화원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용두산과 비슷한 듯 다른 복병산

복병산의 근대 유산을 찾아서

부산기상관측소 전경

복병산 꼭대기 부산기상관측소

해발 76.6m의 복병산도 사실 산이라기보단 작은 언덕에 가깝다. 구봉산과 보수산에 이어 붙은 두 산은 높이도 크기도 생김새도 비슷하다. 위에서 보면 꼭 숫자 8자처럼 생겼고, 옆에서 보면 찐빵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듯한 모습이다. 초량왜관에서 사람이 죽으면 남쪽 담장의 부정문을 통해 대마도로 시신을 내보냈는데, 전관거류지가 형성된 뒤에는 복병산 남측 자락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묻었다.

거류지에 사는 사람이 늘어나니 죽는 사람도 늘어나 1906년 무렵 아미동에 새 공동묘지를 만들면서 복병산 묫자리에 주택가가 조성되었다. 용두산과 비슷한 듯 다른 묘한 산이다.

부산기상관측소 내부 천장 몰딩(좌), 부산기상관측소 내부 계단(우

실제로 항구도시 부산을 상징하기 위해 선박을 본떠서 지었고, 최상층은 영락없이 조타실의 모습이다. 모더니즘 양식이지만 각 층의 경계에 장식한 수평적 가로줄을 강조하여 르네상스적 기풍도 표현하고 있다.

내부도 모든 창문에 고가의 상하수직여닫이창을 달았고, 천장 몰딩 장식은 붙인 게 아니라 처음부터 거푸집 처리를 했으며, 난간 또한 인조대리석 일종인 유려한 테라조 재질로 만들어 상당히 인상적이다.

복병산 배수지 남쪽 입구

부산 상수도의 역사 복병산 배수지

복병산배수지는 체육공원을 겸하고 있고 산책로와도 이어져 있어서 평소에도 운동하러 나온 사람이 많다. 초량왜관 시절 왜관 안의 우물을 이용하던 일본인들이 개항 이후 구덕산에서 발원한 보수천 물을 대나무 홈통으로 연결해서 거류지로 끌어다 쓴 것이 부산 상수도 역사의 시작이었다.

거류민이 늘어나자 1895년 무렵 복병산 아래 대청사거리 부근[광일초등학교]에 배수시설을 만들어 보수천의 물을 본격적으로 끌어와서 식수로 이용했다. 이는 서울보다 십여 년 앞선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상수도 시설이라고 한다.

(좌)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검게 그을린 옛 러시아영사관 터의 축대 필자 촬영

(우) 부산키네마주식회사 터 입구 바닥의 동판

러시아영사관(조선키네마주식회사) 터

복병산 배수지를 나와 중구청 입구에서 메리놀병원 방면으로 우회전해서 굽은길을 따라 40~50m 정도 내려와 대동아파트 입구에서 길 오른쪽의 좁다란 골목길[샘길30번길]로 들어서면 양쪽으로 다양한 연식의 크고 작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유심히 보면 그 주택들이

모두 경사진 땅에 쌓은 두 개의 큰 축대 위에 지어져 있는데, 이 축대는 백여 년 전인 1912년부터 1921년까지 러시아영사관으로 사용한 2층 양옥건물을 건축하면서 쌓은 것이라고 한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더 유심히 보면 축대 곳곳에 검게 그을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40계단 일대를 잿더미로 만든 1953년 부산역전대화재의 흔적이라고 하니 당시 화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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