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SNS서포터즈] 괴산여행 괴산 송시열 유적과 화양구곡
[ 괴산여행 ]
괴산군 가볼만한곳
괴산 송시열 유적과
화양구곡
오늘은 괴산 우암 송시열 유적을 소개하려고 해요.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 효종(재위1649∼1659)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한 분이에요. 학창시절 역사책에서 익히 들은 낯익은 이름으로 충북 괴산에 잠시 머물렀고 그곳에 화양서원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괴산 우암 송시열 유적을 관람하려면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동분소로 입장을 해야 해요. 오늘은 평일이라 관람객이 적어 혼자만의 산책시간을 가기에 너무 좋았어요.
조선시대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의 행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화양계곡은 원래 황양나무(회양목)가 많아 황양동이라 불렸으나, 선생이 거쳐를 이곳으로 옮겨와서는 중국을 뜻하는 중화의 '화'와 일양래복의 '양'을 따서 이름을 화양동으로 고쳤다고 해요.
아름다운 경승지인 화양구곡은 속리산국립공원 내 화양천을 3km에 걸쳐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면 제1곡 경천벽, 제2곡 운영담, 제3곡 읍궁암, 제4곡 금사담, 제5곡 첨성대, 제6곡 능운대, 제7곡 와룡암, 제8곡 학소대, 제9곡 파곶이 연이어 나와요. 구곡의 경관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사가 끊이질 않지요. 화양구곡의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머물렀던 화양계곡에 우암 사후 제자인 수암 권상하가 설정하고 이후 단암 민진원이 각자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어요. 요즘같은 시대에 스승을 생각하는 제자의 존경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네요.
방문전에 화양구곡에 대해 미리 알아두면 빠짐없이 화양구곡을 놓치지 않고 관람할수 있을 듯 해요. 오늘은 사전답사라 생각하고 화양계곡길을 거닐었지요. 화양구곡 중 제2곡인 운영담은 계곡의 맑은 물이 모여 소를 이루고 있는데, 맑은 날에 구름의 그림자가 물에 비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해요. 세월을 머금은 푸릇한 기암절벽은 먼발치에서 흘깃봐도 한폭의 산수화에요.
제3곡인 읍궁암은 모르고 지나친 것 같아요. 다음은 화양구곡 중 제4곡으로 맑은 물속에 보이는 모래가 마치 금싸라기 같다고 하여 금사담이라고도 해요. 화양구곡의 중심이 되며, 우암 송시셜 선생이 이곳 바위 위에 암서재를 지어놓고 학문를 연구하고 수양했다고 하는 곳이죠.
유적지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말년을 지낸 곳으로,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위치하고 있어요. 화양서원은 선생이 머물렀던 장소에 세운 서원으로 조선시대 기호학파 학자들이 많이 모였던 성리학의 중심지였어요. 그리고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에요. 개인적으로 나름 역사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만동묘는 정말 의외의 장소였어요.
송시열 선생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조선 효종(1649년〜1659년 재위)을 도와 북벌정책을 주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어요. 이 유적은 송시열 선생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정신이 깃든 곳으로, 일제가 파괴하였으나 2006년까지 만동묘 7동과 화양서원 2동을 복원하였어요.
묘정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 사당앞에 자리잡고 있어요.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이에요.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짓고, 유척기가 글씨를 썼다고 하는데, 비문은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 획들을 쪼아 놓아 알아보기가 힘들다고 해요.
인조 때 청나라를 다녀온 민정중이 구해온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씨 한 폭을 송시열에게 전해주자 이글을 보고 의종이야 말로 예를 지켜낸 최고의 군주로 칭송하였어요. 만동묘는 송시열이 죽을 때 그의 제자 권상하에게 이곳에 묘우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하여 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라 해요.
만동묘는 노론의 소굴이 되어 상소와 비판을 일삼았고,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양민을 토색하는 등 민폐가 심하여,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 등은 서울 대보단의 경봉각으로 옮겼어요.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 11) 다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어요.
괴산 화양서원 묘정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모신 화양서원의 자리에 놓여 있어요.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모시는 인물에 대한 문장 등을 기록해 두는 것이에요.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뒤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숙종 42년(171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윤봉구가 지었어요.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찾아 세워 놓았어요.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 22년(1696)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창건되던 해에 현판을 하사받아 숙종 42년(1716) 어필로 현판을 달았어요.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그릇된 세금징수로 심한 민폐를 끼쳐 철종 9년(1858)에 폐쇄되고, 논란 속에 고종 7년(1870) 건물이 헐렸어요. 오늘은 괴산 송시열 유적을 관람하였으니 다음에는 화양구곡을 제대로 탐방해봐야겠어요.
※찾아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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