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김제시 블로그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 물과 산과 나무의 본성에 관하여~
"여행은 개코나!"
나는 도로표지판을 읽지 못한다.
운전자가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문맹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물론 지금은 전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역시 도로 위에서 헤맨다.
다른 한편 인지 능력에도 문제가 있는 듯하다.
네비게이션의 음성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네비게이션이 회전교차로를 안내하며 ‘출구는 오후 2시 방향입니다’란 음성을 송출해도 도대체 내 눈은 여러 개의 출구 사이를 더듬거릴 뿐 ‘오후 2시 출구’를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두려움은 커졌다.
교차로에서 끝없이 뱅뱅 돌던 뼈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동시에 경로를 이탈해 길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 정신마저 무너져 목적지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만 달려갔던 ‘길치인생 50년’을 회상하니, ‘여행은 개코나’라며 주저하고 마는 것이다.
남편과 주말 부부로 지내온 지 햇수로 5년째다.
남편이 일하고 있는 지역이 내가 사는 김제와 꽤 먼 거리여서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한다.
바쁜 여름을 보내고 어느덧 쓸쓸한 가을을 맞이했다.
생각해보니 이번 가을은 작년보다 유난히 짧아진 느낌이 아닌가?
10월 초순까지 이어졌던 늦더위와 때 아닌 가을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에야 겨우 찬바람이 돌았다.
나락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풍광을 바라보면서 나는 기어이 혼자만의 여행에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김제 지역에 자리한 산과 강, 바다를 인터넷으로 탐색했다.
사찰이나 보물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집에서 불과 30분 내외에 금산사가 위치해 있으며 사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저수지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실 나는 발이 작은 편인데다 평발이어서 걷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사주에 ‘토’가 많다는데 기질적으로 게으른 탓은 아닐까 괜한 팔자 탓을 해 본다.
하지만 누군가가 블로그에 올린 금평저수지 사진을 보니, 둘레길이 꽤 완만한 편이고 나무데크를 깔아 걷기에 큰 무리가 없게 느껴졌다.
돌아오는 토요일 오후에 금평저수지로 떠날 생각을 굳히자 갑작스레 설레기까지 했다.
저녁에 장까지 봤다.
그 누구도 아닌 오롯이 나만을 위한 맛있는 샌드위치를 만들자!
빵에 넣을 치즈와 양상추, 사과 그리고 머스타드 소스 따위를 고르면서 “허브차까지 곁들인다면 몸에도 좋고 더 낭만적이지 않을까?”라며 클클 웃어대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새 "낭만에 대하여~" 라며 마트 안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다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 싶어 주변을 둘레둘레 살펴봤다.
“소슬소슬 시누대 파도 소리 은빛 물결 너머 춤을 추네”
마침내 토요일이 되자 내가 가장 아끼는 ‘애착 츄리닝’을 입고 네비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차를 조심스레 움직였다.
자칫 금평저수지로 빠져나가는 출구를 지나칠 뻔 했지만 예상 외로 감이 좋았다.
포장한 도로를 완만히 따라 올라가자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청량한 가을볕과 알록달록 물든 잡목숲이 붉은 꽃등을 켠 것처럼 화사하다.
곧이어 산길과 산동네, 산 아래 우묵한 터에 건물을 올린 오래된 음식점과 커피숍들이 보인다.
그대로 내처 달리자 금평저수지 주차장에 닿았다.
역시 감이 좋다.
단 한 번도 헷갈리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증산법종교본부 맞은편 금평저수지 주차장에서 내리자 저수지로 가는 길 위의 보도블럭에는 이미 단풍나무와 벚나무에서 떨어진 마른 이파리들이 쌓여 수북했다.
공기가 달았다.
금평저수지 둘레길은 마을 입구부터 출발해 저수지 둑에 닿는 코스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거꾸로 저수지 둑을 기준으로 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방향도 있다.
언제나 청개구리처럼 다수의 선택을 따르지 않는 나는 둑을 향해 걷기 시작했는데, 산에서 쏟아져내려오는 사람들이 맞은편에서 홀로 걸어오는 나를 힐끔거려 조금 민망한 느낌이었다.
산 입구에 이르자 내려오는 사람들을 헤치고 좁은 나무 계단을 오르느라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어리석었다는 자책도 잠시,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파란 시누대숲이 바람을 타고 소슬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누대가 서로 몸을 비비대며 울려주는 음파(?)는 청량음료처럼 내 속을 뻥 뚫어주었다.
귀를 후벼대는 청량감이 어찌나 큰지 그 시원함에 눈을 감고야 말았다.
길을 걷다보면 중간 즈음 협곡처럼 골과 골 사이의 빈 공간을 이어주는 나무다리가 있다.
위태롭진 않지만 나무다리를 건너다보면 아래에서 솟구쳐 오르는 찬바람과 마주친다.
지상에서 부는 바람은 허공에 떠 있는 사람들의 더운 등을 식혀준다.
올라가는 층계참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가 아니다.
급경사가 없어 절제되고 차분하며 여유 있는 이 느낌. 이것이 금평저수지 둘레길의 큰 매력이다.
걷다보면 다리가 조금 뻐근해 앉아 쉴만한 공간이 없나 둘러보면 눈앞에 무심코 놓인 정자를 발견할 수 있다.
또 저수지를 넓게 조망할 수 있는 나무 의자도 군데군데 놓여 있다.
다리도 쉴 겸 은빛 물결을 조망하며 ‘물멍하기’ 참으로 좋은 공간임에 틀림없다.
시누대숲 울타리 너머로 저수지가 보인다.
물가에 우뚝 선 플라타너스가 노랗게 물들어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거린다.
층계를 오르느라 막혔던 거친 숨을 다듬었다.
저수지는 상당히 깨끗했다.
물이 맑다.
이곳은 전주 모악산에서 모인 물들이 내려오는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금평저수지 아닌가?
물 위로 기러기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금평저수지를 오리알터라고 부르기도 한다니, 오리가 알을 낳을 터전으로 생각한다면 어쩌면 이곳은 새들의 낙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풍수설의 대가이신 도선 스님의 혜안에 엄지 척!
“한 번 사는 인생, 제대로 즐기자!”
맑은 물 아래로 민물고기들이 몰려다닌다.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열어 샌드위치를 먹는다.
머스터드 소스향이 강하게 섞인 치즈 샌드위치는 새콤달콤하면서도 고소했다.
깎아온 사과와 단감도 한 입씩 입에 넣고 텀블러에 든 따뜻한 허브차를 마시자 만화영화 주인공 뽀빠이가 된 듯 힘이 솟았다.
풍류가 빠질소냐!
휴대폰에서 EBS 앱을 열어 이승열의 세계음악기행을 들으며 배낭을 어깨에 메고 천천히 마을로 출발!
때마침 정오를 지난 해가 물주름에 빛을 뿌려 저수지가 온통 반짝거렸다.
마을 끝자락에 닿았다.
산으로 이어지는 입구에는 야자매트를 깔았다.
단감나무 밭을 지키는 신령들일까.
개 두 마리가 멀뚱히 나를 바라본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뒤를 돌아본다.
플라타너스가 보인다.
잡목숲이 바람에 흔들린다.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 고요한 물가 위로 커다란 잎사귀를 사뿐 떨어트리는 나목들.
순리를 따르는 산.
산 아래 엎드린 물.
자연의 겸손함에 발길이 멈춘다.
나무 데크 위에도, 저수지 풀섶에도 온통 낙엽이 수북하다.
낙엽 천지다.
밟을 때마다 종잇장처럼 사그락거린다.
내가 사는 김제. 이 지역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하는 저수지는 금평저수지이다.
얼마나 잔잔한 성품인가.
용기를 갖고 홀로 여행을 시작해 이 지역과 금평저수지의 본성을 이해하게 된 나는 또 얼마나 풍요로워진 사람인가.
언제나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던 나에게 이곳은 생의 작은 비밀들 즉 인생의 빛과 어두움을 귀띔해주는 듯 하다.
그래서일까?
걷다가 마주치는 그 누구든 이해할 것 같고 누구에게든 슬며시 웃어줄 것 같다.
2022 김제시 블로그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물과 산과 나무의 본성에 관하여' by 정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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