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조선시대 군산이 낳은 최고의 무장, 최호 장군 유지
조선시대 군산이 낳은 최고의 무장,
최호 장군 유지
2024년 갑진년 청룡의 해
군산 첫 여행지로 찾은
개정면 최호 장군 유지에서 본
군산의 넓은 들녘입니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있어
박무가 낀 바람에 고군산 군도까지
막힘없는 풍경이 아쉬운데요,
그래도 한눈에 봐도 풍요로운 땅을 가진
군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새해 첫 군산 여행지로
개정면 일대 가볼 만한 곳 중
군산의 영웅 최호 장군 유지와
발산리 유적지를 차례로 둘러볼 예정인데요,
먼저 세상의 한줄기 빛과 같은 군산의 위인이면서
충신인 최호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봅니다.
아침을 더디 오게 하는 박무가
아스라하니 펼쳐지는 군산 개정면 발산리는
충신 최호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고봉산을 넘어온 아침 햇살이
반월산에 자리한 최호 장군 유지를
부드럽게 비춰줍니다.
날 좋은 날이면 팽팽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소리가 울려오는
국궁장 진남정(鎭南亭)을 사이에 두고
구 최호 장군 유지와 새롭게 조성한
최호 장군 유지가 있습니다.
월명산의 100년 활터,
진남정
월명산 아래 100년 활터였던 진남정은
활터 주변으로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들어와 살면서 활을 쏠 수 없는 폐정(閉亭) 위기에 몰리자
2003년 임시로 오식도에 활터를 세웠고
군산의 영웅 최호 장군 유지 주변 반월산에
2006년 새롭게 활터를 조성했다는데요,
최호 장군의 기개를 닮은 궁사들의
국궁 실력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 같습니다.
반월산 진남정 아래 원발산마을에 있는
최호 장군 유지입니다. 1729년 최초 건립했고
1976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요.
최호 장군을 기리며,
최호 장군 유지 성역화
2002년 완결된
최호 장군 유지 성역화 사업으로
뒤쪽 진남정 아래 새롭게
최호 장군 기념관과 사당을 건립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구사당이
최호 장군 기적비와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당에는 충의사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요,
문이 닫혀 있어 확인은 할 수 없지만,
위패는 새롭게 조성한 최호 장군 사당으로
이건한 듯합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 양식으로
전면에 툇간이 있는 전형적인 사당 구조인
구 사당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새롭게 조성한 충의사와 함께
부지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역화 사업 이전에는
반월산 너머에 사당 충의사가 있었고
앞쪽에는 최호 장군 무덤과 일가 무덤만
허술하게 남아 있었다는데요,
성역화 사업 일환으로
1994년 먼저 관리사와 유물전시관을 지었고
2001년 외삼문과 내삼문을 갖춘
충의사를 건립하고
2002년 성역화 사업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최호(崔湖, 1536~1597) 장군은
임피현 서삼면 발산(현, 개정면 발산리)에서
아버지 최한정과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 4남으로 태어나
1574년 무과 병과 제5인으로 급제하기 전까지
북방 국경지대에 두었던 군대인
정로위 현신교위(定虜衛 顯信校尉)로
있었다고 합니다.
부친이 1552년 무과에 급제해
장군으로 북방을 지키고 있었기에
부친을 도우며 10여 년간
무장 수업을 받았다는데요,
부친 복무지로 가기 전 어렸을 때는
개정면 발산마을 할아버지 슬하에서
학문과 무예를 닦았다고 합니다.
유물전시관은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최호 장군이 1574년 무과에
처음 급제했을 때 받은 홍패와
1576년 무과 중시에
장원급제 하며 받은 홍패 등과
교지 등 고문서가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최호 장군은
1576년 실력이 월등한 무장들끼리
시험을 치른 무과 중시에 장원 급제 해
종 6품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에 임명되었고
이후 무장으로서 탄탄대로를 달렸습니다.
1583년 조선 건국 이래
여진족의 최대 변란이었던
니탕개의 난
(여진족 기병 5천여 기 와 보명 2만여 명의 침입)을
연달아 막아내며 관품을 3단계나 끌어올렸고
1594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재임 시까지
10년간 여진족의 침입을 한 번도
받지 않을 정도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고 합니다.
최호 장군은 임진왜란 이전인
1589년 오위도총부 도사에 임명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 5개월 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는데요,
1593년 부친이 사망하자
고향에서 3년 상을 치르던 중
임금의 명으로 다시 전장으로 나가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복직해
여진족 약탈을 막았고
1596년 충청도 수군절제사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해
청난공신 2등 공신에 책봉되었습니다.
이후 정유재란 때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한
칠철량 해전에서 도망칠 궁리만 한
원균과 달리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분투했지만,
결국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사후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고
시호로 충원공(忠元公)을 받았습니다.
사당 충의사 옆으로
최호 장군의 무덤과 부인 무덤이 함께 있습니다.
최호 장군은 조선시대 임피와
옥구 지역 인물 중 가장 높은 품계인
종 2품 병마절도사까지 오르고
공신으로 책봉된 위인입니다.
조선시대 문인에 비해
하대 받던 무인의 자손으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력으로 이룬 위업인데요,
어려서부터 발산마을 할아버지에게
글과 무예를 익혔고 청년기 무장인
부친을 도와 계속 무예와 실전을 연마했고
40세에 무관 중의 무관이라는
무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것도
오직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입니다.
반월산 아래 널따란 군산의 들녘을 바라보고 있는
최호 장군의 영혼이
군산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오직 실력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힘이고 밑바탕이라는 것을.
오성산을 넘고 고봉산을 넘어온 아침 햇살이
반월산 아래 최호 장군 유지를
따스하게 비춰주는데요,
군산에 가면 군산이 낳은 위대한 영웅
최호 장군 유지에 들러
꼭 최호 장군이 남긴 메시지를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조선시대 군산이 낳은 최고의 무장
최호 장군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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