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시간 전
슬도아트와 함께 그림 읽기 ② 전시를 처음 보는 당신에게
허인영 슬도아트 전시기획 담당
저는 슬도 곁에 있는 전시 공간, 슬도아트에서 전시를 기획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슬도아트가 이곳에 자리 잡은 지도 어느덧 2년 차가 되었네요.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과 함께 하루하루 활기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특히 전시장을 처음 찾은 듯한 표정의 관람객을 마주할 때면, 반가우면서도 저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어릴 적 미술관에 갔던 날이 자연스레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주말이면 저에게 어린이대공원에 가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동물원과 놀이기구를 떠올리며 들뜬 마음으로 나섰지만, 도착할 때 즈음 아버지는 방향을 틀어 미술관으로 향하시곤 했습니다.
놀이공원이 아니라는 실망스러운 기분으로 마주한 것은 백남준 작가의 작품이었습니다. 수많은 텔레비전이 탑처럼 쌓인 그 작품 앞에서, 저는 속상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원망했지요. 어린 저에게 미술관은 마냥 지루하고,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전시장에서 떼쓰는 아이들의 마음이 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아버지를 따라 말없이 전시를 보다 보니, 어느 순간 그 풍경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이 좋아졌는지, 아니면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 좋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때 처음으로 예술을 보며 무언가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후 우연히 미술을 배우게 되었고,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던 저는 ‘예술’이라는 언어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전시장을 찾는 일은 점차 제 취미가 되었고, 청소년기에 본 알렉산드로 멘디니의 전시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디자이너이자 예술가였던 그의 작업은 따뜻하고 유머러스했죠. 그날 이후 저도 언젠가 ‘좋은 전시’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고, 그 마음이 저를 지금의 슬도아트까지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전시기획자를 세련되고 우아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상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다릅니다. 무거운 사다리를 옮기고, 드릴로 벽에 나사를 박고, 작품이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하며 설치합니다. 하루 종일 전시 서문과 홍보물을 수정하고, 수많은 자료와 계약서를 살피며, 작가와 소통하고, 운송과 설치 일정을 조율합니다. 때로는 전시를 소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 앞에 서기도 하고,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는 긴장으로 시야가 흐려지기도 하죠. 작품이 훼손될까 걱정하며 전시장을 주시하다가 “만지면 안 돼요!”를 외치며 벌처럼 튀어 나갈 때도 있습니다.
문화적 기반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전시장이 단순한 공공시설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술에 취한 채 시비를 거는 분, 큰소리로 통화하며 타인의 감상을 방해하는 분, 작품에 손을 대고도 당당한 분도 계십니다. “아가씨, 커피 한 잔 타와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 일을 계속해도 괜찮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건 아주 짧은 한마디입니다.
“그림은 잘 모르지만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우리 동네에 이런 공간이 생겨서 고마워요. 울산에서 오래 좋은 전시 만들어주세요.” “천국을 본 것 같아요.”
그 말들이 저를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이번에 슬도아트에서는 세 개의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갤러리 ‘아’에서 열리는 고우련 작가님의 〈힐링 싸우나〉는 욕실 속 수증기를 통해 치유의 감각을 표현한 작업들로, 실제 욕조와 아로마 향기를 더해 보다 친근한 공간으로 연출했습니다. 때수건 모양의 리플릿도 함께 제작했죠. 전시장을 실제 ‘사우나’로 착각하고 오신 분들도 계셨답니다.
갤러리 ‘도’에서는 송은지 작가님의 〈Secret Garden 비밀의 화원〉이 진행 중입니다. 평면 회화 작품이지만 식물과의 연출을 통해 공간 전체가 하나의 풍경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간 안에 설치된 실제 식물들은 저에게도 숨 쉴 틈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갤러리 ‘트’에서는 이우수 작가님의 개인전 〈96.5%〉가 열립니다. 바닷물 속 물과 염분의 비율에서 영감을 받은 제목으로, 동시대 미술이 평면이나 입체라는 틀을 넘어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관람객들께서 “요즘 미술은 너무 어렵다”고 하실 때면, 어린 시절 마주했던 백남준의 작품을 떠올립니다. 이 작품은 1988년, 비디오아트가 생소하던 시절에 만들어졌습니다. 기술과 예술, 동양과 서양, 전통과 미래를 연결 지으려 했던 백남준의 상상은 지금의 미디어아트 흐름과도 자연스럽게 닿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어렵다고 느끼는 예술은, 그가 이미 수십 년 전 내다본 흐름 위에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술은 그렇게 시대보다 조금 먼저 앞서 나가며, 우리가 살아가는 감각을 천천히 확장해 줍니다.
저 역시 지난 1년간 회화뿐 아니라 텍스트, 영상, 설치, 향기, 소리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전시를 기획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예술이 특별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전시장을 처음 찾는 분들에게는 “그냥 천천히 보셔도 괜찮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고 싶습니다.
당신의 하루와 전시가 우연히라도 따뜻하게 스치기를 바라며 저는 오늘도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슬도아트가 이 지역의 일상에 스며드는, 꼭 필요한 예술 공간으로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 대왕암소식지 2025년 여름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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