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대구 중구 관광지 국체보상운동기념관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을 휩쓴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건립되었으며

2011년 10월에 개관하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관람시간: 10:00~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명절

입장료: 무료

주차: 유료

관람문의: 053-745-6753

대구시 중구는 2017년 10월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세계문화유산

최종 등재 결정으로 지역 최초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적 외채 갚기 운동으로

일반 평민이 주동이 된 한국최초의

시민운동이었으며 부녀자들이

대거 참여한 한국최초의 여성운동이기도 하였으며

전 국민적 기부운동이기도 했습니다.

매년 2월 21일은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의 위대한 대구정신으 이어받은

자랑스러운 국채보상운동기념일이자

대구시민의날입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은 기부문화의 1번지로써

부채에 허덕이던 세계경제를 구할

희망의 집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전 과정을 알 수 있는

국채운동기록물 2475건이 201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 생생한 흔적을 전시실과 영상자료실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제1전시실은 지하 1층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좌측 계단으로 내려가거나 우측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도 됩니다.

우리의 국채 1,300만원은

바로 한국의 존망과 관계됩니다.

갚으면 나라가 존재하고

갚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김광재와

서상돈의 활약 내용입니다.

우리 이천만 국민이 담배를 3개월간 끊고

1명단 20전 씩 모으면 국채를 갚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대구광문회 서상돈에 의해 대구지역

국채보상운동이 발의된 국채보상운동의 태동과

1906년도 대한제국의 1년 예산에 버금가는

1,300만원 나라빚 설명입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에서

지식인과 상인층의 주도로 점화된 국채보상운동은

2월 21일 서문 밖 수창사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

설치를 시작으로 본격화 되었습니다.

앉은뱅이 걸인의 의연상입니다.

구걸한 돈을 의연한 앉은뱅이 걸인 정만권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에 보내는 범민족적 열기와

우리 국민들의 애국사상이 얼마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확산을 이끈

서문시장 상인들입니다.

가난한 짚신 장수부터 콩나물 장수,

술, 밥, 떡장수 등 영세 상인들과

마부, 노비 등에 이르기까지

애써 번 50, 60전과 1, 2원을

아낌없이 의연금으로 내어 놓았답니다.

여성들의 의연입니다.

대구 남일동에서 정운갑의 어머니 서씨,

서병규의 처 정씨 등 7명의 발기로

남일동 폐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고

나라를 위하는데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내용의 경고아 부인동포라는 격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의 감동적인 의연입니다.

9세 아이의 저금통 의연,

고아원 학도들의 심부름값 의연,

초동들의 땔나무와 짚신 팔아 3원 수합 의연,

가난하지만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어머니를 설득한 11세 어린이 의연,

보통학교 생도들의 의연,

미화 1원을 의연한 교포 어린이도 있었습니다.

신분을 넘어선 기생들의 의연입니다.

여자의 몸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유일한 패물을 팔아 의연하였습니다.

제2전시실 입구에는

인증샷 영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안내 순서대로 터치하면

인증샷 화면이 됩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 확산으로

당황한 일제가 운동의 선두에 선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을 가하고자

이에 대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댈과

총무 양기탁의 모습입니다.

국채보상의연금 처리는

온국민의 성원 속에 지속된

국채보상운동으로 모금한 돈은

1907년 3월부터 1908년 7월까지

약 20만원 정도가 수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10년 말 국채보상금으로 관리되던

약 15만원 모두 경무총감부에 귀속되어

일제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의 결과는 1907년 2월에 시작되어

온 국민이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중단되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전말은

채무자의 책임을 다하자는 성격과 함께

채권자의 부추김과 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결제는 부채의 바다에 빠져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탁본이란 음각이나 양각의 글자나 무늬,

그림 등을 원형 그대로 종이에 찍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국채보상운동 유적 약도입니다.

국채보상운동 확산의 주요한 진원지 서문시장,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운동 군민대회 대최장소 북후정터,

국채보상운동의 태동지 대구광문사 옛터,

여성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진골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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