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시간 전
쾌지나 칭칭나네의 주인공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서생포왜성에서 보낸 여름
한여름이 되면 바깥나들이가 다른 계절과 같지가 않습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흐르고 몸에서 힘이 빠집니다.
가져온 물이라도 많지가 않으면 더욱더 힘들어지게 됩니다.
이 시기에 울산의 서생포왜성을 올라가는 것은 땀이 물 흐르듯이 느끼는 경험을 해주게 만들었습니다.
울산왜성은 역사성이 있는 곳이며 서생포왜성은 왜성의 구조를 잘 보존하고 있는 왜성이기도 합니다.
울주군도 상당히 무더운 여름 날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해변가로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찾아와서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서생포왜성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거점공간이었던 곳입니다.
출성술의 대가이며 칠본창 중 한 명이었다는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서생포 왜성은 그 구조가 잘 보존되고 있는 성입니다.
아래에서부터 서생포왜성으로 걸어서 올라가 봅니다.
생각보다 경사가 있으니 한여름에 올라갈 사람들은 땀을 흘릴 생각을 하고 올라가야 합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열도를 이루는 네 개의 섬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섬으로 9개의 주 혹은 지방(九州)을 뜻하는 규슈라는 자명의 중심에는 구마모토시가 있는데 그곳에 구마모토 성이 있습니다.
구마모토 성은 왜군이 철수하면서 서생포왜성을 쌓을 때 동원된 조선인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성을 쌓는 데 동원하였다고 합니다.
울산 울주에 자리한 서생포 왜성은 해발 133m 꼭대기에 왜성의 기본 형태인 본환을 구축하고 천수각을 세웠으며, 그 아래로 이지환을 구축하고 둘레에 다시 삼지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가면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보았을 때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은 상비군이 일본군처럼 많지가 않았었습니다. 조선 땅으로 들어온 가토 기요마사는 1593년(선조 26)에 경상 좌수영 소속 서생포 수군만화진성을 함락한 뒤에 이곳에 일본군의 성을 쌓아두었습니다.
지리적으로 포구와 가까이 있었기에 전쟁 당시에 중요 거점으로 활용이 되었습니다.
울산왜성, 동래 왜성, 기장 왜성, 임령포왜성등과 함께 남해의 중요 거점으로 활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은 다양한 형태로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서생포왜성은 1594년(선조 27)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카토 기요마사와 강화 회담을 한곳으로 유명한 성입니다.
이제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합니다.
위쪽으로 올라올수록 성의 형태는 견고하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2011년 발굴조사에서 1 구역 고상건물지(高床建物址) 1·2호, 주혈군(柱穴群), 2 구역 기단건물지(基壇建物址) 1호와 고상건물지 5·6호, 수혈(竪穴) 2호가 조성되었습니다.
1 구역 고상건물지 1·2호의 경우 주혈 사이의 간격은 남북 2m, 동서 4.8m로 모두 정면 열 칸, 옆면 남북 외측 두 칸, 내부 한 칸으로 조성된 것으로 나왔습니다.
서생포왜성의 곽(郭)의 배치는 주곽인 본환(本丸)을 중심으로 곽을 붙여 나가는 제곽식(梯郭式) 성곽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서생포왜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서생포왜성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징발되었는데 이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왜군이 철수할 때 일본으로 끌려가 구마모토 성을 구축하는데 동원되었는데요. 조선인 후손들 중에 서생이라는 성씨가 지금도 구마모토 지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경상도 지방에서 전해지는 민요의 하나로 쾌지나 칭칭 나네가 있습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건데 임진왜란 이후에 나온 노랫말로 '쾌재라 가등청정(가토 기묘 마사)이 쫓겨 나가네'의 줄어든 말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가토 기요마사가 쫓겨서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신나게 부른 것이라고 합니다.
고요해 보이는 울주의 바다에서 우리의 역사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서생포왜성 탐방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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