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일 전
[호국보훈의 달] 조선의 민초 <25의용단>을 만나다
민초(民草) : 민중을 잡초에 비유한 말.
민중을 잡초에 비유한다는 것이 다소 의아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가벼이 여겨질 수 있는 민중이 국가의 위기 속에서 강인한 민중 의식과 호국정신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려던 활동과 의지를 역사 페이지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요.
이러한 민족성은 임진왜란 시기 민중, 승병, 아낙 등의 백성 모두가 의기투합하여 일본과 맞서 싸운 의병활동을 비롯해 근대에 접어들어 3.1절 만세운동, 국채보상운동, 독립을 위한 을미, 을사, 정미의병 활동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군 활동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드릴 수영사적공원에 조성된 <25의용단(義勇壇)>은, 임진왜란 시기에 왜적으로부터 수영성을 지키기 위해 7년간 항쟁해온 25명의 의인들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제단인데요.
<수영사적공원>이 1968년 수영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1972년 <25의용단>이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며 사적지의 역사적 가치를 높여주기도 했고요. 그리고 최근에는 공원 일대를 정비 및 공원화함에 따른 상징 조형물이 조성되며, 단지 사료적 가치만을 인정받는 공간이 아닌 주민을 위한 일상 속 휴식공간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고요. 이를 통해 새로운 사적공간의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운영시간 : 10:00 ~ 17:00
휴무일 : 없음
호국정신이 깃든 곳
경상도관찰사 아래 육군을 지휘했던 경상좌병사, 경상우병사와 수군을 지휘했던 경상우수사와 함께 왜구로부터 국토와 백성을 보호하기위해 설치된, <경상좌도수군절도영사 (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
울산 개운포에서 1544년 현재의 수영동인 '해운포'로 이전된 이후 (잠시 동안 '감만이포'로 이전을 하기는 했지만) 군제개혁(1895년) 이전까지 오랫동안 수영동에 자리를 잡으며 국토를 수호하기 위한 군사시설로 사용되어왔고요. 현재는 그 군사적인 기능을 상실했지만, 사적시설이자 여가시설로 사용되며 지역 주민에게 역사적 교훈과 일상의 활력이 되는 휴식을 제공해 드리는, <수영사적공원(水營史蹟公園)>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드릴 <25의용단>은, 임진왜란 시기 왜적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항쟁했던 '25의용'을 기억하고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853년 (철종 4년) 경상좌수사 장인식에 의해 추모비와 함께 건립된 제단입니다.
서두에서도 언급됐듯 1968년 옛 경상좌수영 일대가 '수영공원'으로 지정됨에 이어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2호로 '25의용단'이 지정되며, 지역 주민의 향토심과 자긍심을 고취시킴과 함께 호국선현(護國先賢)의 값진 희생을 일상 속에서 되새겨볼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사용되어오고 있고요.
최근에는 <수영사적공원(水營史蹟公園)>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보다 많은 시민과 수영구를 찾아와준 관광객분들에게 다채로운 편의시설을 함께 이용하며 알려드릴 수 있도록,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한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요.
본 사업을 통해 '부산지하철 수영역'에 설치된 "25의용단 벽화"와 '경상좌수영 남문터'에서 시작해 '25의용단'까지 이어지는 구간에 호국선현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설치하는 등, 대중이 보다 쉽게 인지하고 수용하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25명의 의인
수영사적공원 주차장 방면에 위치한 존성문(存誠門)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함께 관리사로 사용되는 "전사당(典祀堂)"과 의용사(義勇祠)로 이어지는 "영회문(永懷門)"을 만나보실 수 있으신데요. 1972년 25의용단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체계적인 관리를 이어온 수영구. 특히 2001년 3월에는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정화사업을 추진하며, 앞서 소개 드린 '존성문', '전사당', '영회문', '의용사' 등을 설치하며 현재 방문하시면 만나보실 수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됐고요.
최근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수영구의 태도와 그간의 발자취를 고려해 보면, 시설의 확장만이 아닌 공연과 행사를 통해 누구나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콘텐츠로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해보기도 합니다.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8,700명의 일본군이 부산진을 침략하며 발발한 '임진왜란'. 부산포의 정발 장군과 다대포의 윤흥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의 항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일했던 당대 조선의 전쟁 태세로 인해 속절없이 밀릴 수밖에 없었고요.
특히 경상좌수영의 경우 '제승방략 체제'를 이유 들어 박홍 장군이 진을 버리는 일이 발생하며, 좌수영의 군졸과 백성은 살육과 약탈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홍 장군이 성을 버리며 태워버린 군선과 군수품. 여기에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 해안선을 따라 세워진 '왜성'은 외부로부터의 원조를 차단함과 동시에 감시가 항상 따라붙으며 백성과 의용군의 목줄을 더욱 조여왔는데요.
하지만 '25의용'은 척박하고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7년간 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펼치며 순절하는 그날까지 역사에 기리 남을 희생과 호국정신을 선보였고요. 그리고 그들의 행적은 우리 민족의 호국선현의 기개를 드러냄과 동시에 현재 우리에게 민초의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하나의 지표가 되어주며, 저항운동의 근간이 되기도 합니다.
임금과 더불어 나라와 국민에 헌신하는 의미를 담은 '충(忠)'과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의리를 이행함을 의미하는 '의(義)'. 1609년 (광해군 1년)에 동래부사였던 '이안눌'에 의해 25의용의 사적을 수집한 '정방록'을 기록함하고 이들의 문에 '義勇(의용)'이라는 문구를 붙여 '충의(忠義)'를 기리기 시작했는데요.
25의용(義勇) 김옥계(金玉戒), 정인강(鄭仁彊), 이희복(李希福), 최송엽(崔松葉), 최수만(崔守萬), 박지수(朴枝樹), 김팽량(金彭良), 박응복(朴應福), 심남(沈男), 이은춘(李銀春), 정수원(鄭壽元), 박림(朴林), 신복(辛福), 이수(李壽), 최한연(崔汗連), 최한손(崔汗孫), 최막내(崔莫乃), 최말량(崔泰良), 김달망(金達亡), 김덕봉(金德俸), 이실정(李實貞), 김허농(金許弄), 주난금(朱難金), 김종수(金從守), 김진옥(金進玉) |
1853년 (철종4년)에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의용단(義勇壇)'을 세웠으며, 당시 '의용당'을 지어 봉행하던 관례는 현재까지도 매년 가을 봉행을 올리며 그들의 기상과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25의용단>과 <수영사적공원>이 지닌 역사·문화적 가치를 시설을 이용하시는 모든 분들이 자연스레 수용하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고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전통공연과 지역 아티스트들이 주체가 되는 공연을 개최하고 있는데요.
수영사적공원에 방문하셔서 25의용의 충의정신과 기백을 느껴보시고 사적공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이용해 보시며, 6월 호국보훈의 달에 걸맞은 '의미가 가득한 나들이'를 나서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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