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구천면로의 옛 모습은 잊어야 한다.

걷는걸 참 좋아한다. 일이 있어 어쩔 수 없는 날을 빼고는 매일 만 보 이상을 걷는다.

버스나 지하철의 한두 정거장 거리 정도는 걷는 게 더 편하다.

이젠 걷는 게 습관이 돼서 만 보를 채우지 못하게 되면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한 것 같아 기분이 찝찝해진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서든 기어이 만 보를 채우고 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부터 걷는 걸 좋아했다.

특히 감수성이 풍부했던 고등학생 때부터 많이 걸었던 것 같다.

그 많은 날 중의 소중하게 남아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 있다.

추억의 그날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바로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다.

아마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학창 시절의 풋풋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때가 고등학교 1학년 가을이었다.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의 집이 흑석동이었다.

거리에 낙엽이 이리저리 뒹굴던 날, 학교가 끝나고 친구와 나는 미아리에서부터 흑석동까지 걸었다.

고궁 돌담길을 지날 때, 거리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낙엽을 차면서 걸었다.

그날을 생각하면 이젠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진 감성이 어느새 촉촉하게 되살아난다.

언젠가 친구에게 그날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친구도 그날의 기억을 나만큼이나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무척 기뻤다.

둘만의 소중한 추억의 시간이었기에 친구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날의 시간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좋았다.

그때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 많은 시간을 걸으면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아쉽게도 그날의 수많은 이야기는 나와 친구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친구와 내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있다 보니,

그날의 이야기는 그 뒤에 기하급수적으로 생겨난 삶의 이야기에 떠밀려 기억의 창고에서 지워진 모양이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그때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생각해봤다.

잊힌 많은 이야기 중에 책 이야기만큼은 분명 했을 거라는 확신이 섰다.

친구는 평소에 책을 많이 읽었고, 늘 내게 책 읽기를 권했다.

좋은 친구를 만난 덕분에 그때부터 책 읽기를 시작해 지금까지 늘 가까이하고 있다.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제주 올레길이 유명해지면서 시작된 둘레길 열풍이 전국으로 퍼져나간 지 오래되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지방마다 그곳을 대표하는 걷는 길이 있다.

그런 길은 대부분 경치 좋은 곳을 따라 만들었다.

걷기에 그만큼 좋은 곳이 없지만, 그런 길을 걸으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의 공간인 도시 속에 걷기 좋은 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있으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크고 복잡한 대도시 서울에도 걷기 좋은 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사는 강동구에도 걷기 좋은 길이 있다.

강동형 도시재생 사업으로 구천면로가 걷고 싶은 거리로 탈바꿈했다.

새롭게 변신한 구천면로는 명일역에서부터 천호초등학교 입구까지 이어진다.

요즘은 이 길로 다닐 기회가 별로 없지만, 예전에는 버스를 타고 자주 지나다녔다. 그렇기에 이 길의 옛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구천면로는 요즘도 그렇지만 오랜 옛날부터 아주 중요한 길이었다.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에 속했던 길로 한양과 동남 내륙 지방인 이천, 충주, 문경새재를 이어주는 길이었다.

광나루는 강동구 지역을 거쳐 광주와 연결되고, 뱃길로는 충주를 거쳐 남해안으로 가는 요충지였다.

그렇다 보니 구천면로는 물산이 활발하게 오르내리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런 역사가 있는 구천면로는 강동구의 구도심을 지나 광진교와 연결되는 강동구의 중심 도로다.

구천면로를 찾은 날은 바람이 불긴 했지만, 봄기운이 느껴질 만큼 좋은 날씨였다.

사람들이 서둘러 봄을 생각하는 게 샘이 났던지 제법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직은 떠나기 싫은 겨울이 마지막으로 발버둥을 쳐보지만, 기세등등하던 때의 매서움은 찾을 수 없다.

성덕여자중·고등학교 앞길에는 구천면로의 역사를 알려주는 설명문이 붙어있다.

길 맞은편에는 구천면로를 알리는 입간판과 조형물이 있어 마치 여행지라도 온 것처럼 마음을 들뜨게 했다.

성덕여자중·고등학교 앞에서부터 구천면로를 걸었다.

이 길의 옛 모습을 대충 기억하고 있는 데다 걷고 싶은 거리로 재단장했다고 하니까 무엇이 달라졌는지 매의 눈으로 찾게 된다.

걷기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치 무슨 조사라도 나온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일 먼저 우리 가족이 자주 왔던 길 건너편에 있는 음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시집간 두 딸이 좋아해서 가족이 여러 번 왔던 음식점인데, 옛 모습 그대로여서 반가웠다.

그 덕분에 주말에 다녀간 두 딸이 또 생각났다.

이리저리 거리를 살피면서 천천히 천호초등학교까지 걸었다.

예전과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인도가 무척 깨끗해졌다. 일부 구간은 길이 더 넓어진 것처럼 보였다.

건물들이 그대로인 것을 보면 길이 넓어진 게 아니라, 깔끔하고 깨끗하게 정리·정돈되면서 길이 넓어 진 게 아닌가 싶었다.

길은 굴러다니는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구천면로는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인해 신도심과 구도심 간에 벌어진 격차를 줄이기 위해 도시재생 사업을 시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문에 거리의 건물 외관이 새로 지은 것처럼 산뜻하고 깔끔했다. 그렇다 보니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리가 환해졌다. [사진 : 2, 3]

그뿐 아니라 거리의 간판도 보기 좋았다. 거리의 간판 대부분이 새롭게 단장했다.

단순히 새것이어서 좋은 게 아니라, 간판 자체가 다들 세련되고 예뻤다.

간판들은 건물 외관에 맞게 다양한 재질과 색상으로 되어 있었다.

돌출된 상호의 글씨체는 흔히 보는 간판의 글씨체가 아니라, 아기자기한 예쁜 글씨체로 되어 있어 보기 좋았다.

깨끗한 거리에 보기 좋은 간판들이 달려있어 정말 예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천호초등학교 사거리에서 도로 너머에 있는 길은 보면 같은 길인데도 그 모습과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사거리에서 큰길을 건너 명일역 방향으로 되짚어 걸었다.

길 중간중간에 주민들의 생활문화와 여가생활을 위한 문화마을 공동체 활동 거점들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곳은 “북카페도서관 다독다독”이었다.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외관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책들과 그 공간에서 여유 있게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발걸음이 저절로 멈추었다.

자석에 끌리듯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책장에 진열된 책들과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윽한 커피 향이 있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책을 좋아하고 커피를 좋아하니 왜 안 그렇겠는가.

책꽂이에는 책들이 비스듬히 여유 있게 꽂혀 있었다. 북카페는 도서관의 책꽂이처럼 빈틈없이 책들이 꽉 들어차 있으면 재미가 없다.

책들이 공간을 두고 기울어지게 꽂혀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유가 느껴진다.

걷는 걸 그만두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싶었다.

그렇지만 오늘따라 달리해야 할 일이 있어 더는 머물지 못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북카페도서관을 나왔다.

들어와서는 내부만 둘러보고 휭하니 가는 사람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텐데, 일하는 젊은 분이 차분한 목소리로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안 그래도 구경만 하고 가는 게 미안했는데, 인사까지 받고 나니까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걸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쉴 수 있는 구천면로 동네 숲이 나타났다.

자그마한 공간이지만, 누구나 편히 쉴 수 있는 벤치가 있다.

동네 숲 옆에 카페가 있어 날씨 좋은 봄날에는 커피 한잔을 들고 이곳에 앉아 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손으로 전해오는 따스한 커피의 온기를 느끼면서 잠시나마 화창한 봄날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덕동 집에서부터 구천면로까지 걸었는데도 걸어야 할 목표가 채워지지 않았다.

목표를 채우려면 돌아가는 길은 당연히 걸어야 했다. 걸어서 고덕역에 도착할 때쯤, 만 보가 채워졌다.

걷고 싶은 길을 걸었고, 하루의 목표까지 채웠으니 이거야말로 일거양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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