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영천 항일운동성지 영남지역 의병연합 산남의진 충효재
3월이면 온 산천에 흐르는 함성이 들립니다.
대한독립만세, 우리는 독립을 외쳤습니다.
1910년 을사늑약에 의하여 국권이 일제에 의해 찬탈당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에도 우리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쳤습니다.
이에 다시 우리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수많은 순국선열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였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납니다.
이 운동은 구한말 총체적 사회구조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전개되는데요
이를 진압하고자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원병을 요청하지도 않은 일본군도
일본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인천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의 속셈은 임진왜란의 재현으로 조선을 삼키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동학농민군을 조선관군과 함께 토벌한 일본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에 있는 동학 협력자를 모두 처형시키는데 젊은이는 동학이란 말만 들어도 사살하고 맙니다.
이는 조선의 젊은 의병 세력들을 진멸하기 위한 하나의 작전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조선에는 젊은 의병들이 사라졌습니다.
이후 의병대장들의 연세가 환갑이 넘은 경우가 많은 이유입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 계획 중 젊은 의병 세력 제거가 성공한 것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이 진압된 후 청나라 군대는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조선을 삼키는 게 목적이었던 일본군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젊은 의병 세력이 사라지자 오히려 조선의 조정에 관여하여
국권이 일제에 의해 침탈당하기 시작합니다.
영천에서 일어난 산남의진은 온몸으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병들의 절규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산남이란 고려시대 이래 영남을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이며
영남의 의병들이 영천시 자양면 충효재에 모여 거병한 것에서 유래하는데요
‘영남지역 의진’이란 뜻의 ‘산남의진’을 이름으로 의병 항쟁을 준비한 것입니다.
산남의진은 다른 의병조직과는 달리 영남지방 도처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여든 의병 연합체입니다.
따라서 한 명의 사령관에 의해 움직이는 다른 의병조직과는 달리 여러 명의 의병장에 의해 유격전을 수행해
당시 일본군이 토벌하는 데 무척 어려움을 겪은 의병조직이었으며,
무장 독립운동의 무대가 연해주로 무대를 옮길 때까지 산남의병의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은 치열하게 계속되었습니다.
영천충효재는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산남의진 대장 정환직(1844~1907) 선생과
그 장자인 정용기(1862~1907) 부자의 충효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동네 이름을 검단동에서
충효동으로 고쳐 1934년에 건립하였습니다.
정환직은 고종 24년(1887) 천거에 의해 북부 도사로 관계에 진출하여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요
그가 충추원의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밀령을 받아 각 도에 밀사를 파견하여 의병의 분기를 지휘하였습니다.
정환직이 관직에서 물러나고 1906년 영천으로 간 그의 아들 정용기는
영천 창의소를 설치해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여 2월 의병 1천여 명의 추대로 의병 대장이 되었으며,
포항 청하와 영천 자양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나 포항 죽장으로 이동해 입암계곡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일본군에게 역습당해
정용기를 비롯한 많은 의병이 전사하고 맙니다.
정환직은 산남의진 의병대장 정용기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천으로 내려가 아들 대신 의병대장이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1907년 11월 6일 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서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체포돼 대구감옥으로 압송당하던 중 현 경북 영천시 조양각에서 향년 64세의 나이로 총살당하고 맙니다.
경북 영천은 임진왜란 때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구한말 국권이 외세 일본에 의해 찬탈당할 당시
산남의진을 조직해 근대 영남의병의 산실이 됐습니다. 산남의진은 영남지방이라는 유학의 고장에서
영남의 대부분(영천, 경주, 영덕, 안동, 밀양, 의령 등) 백성들이 호응해 창의 한 지역 연합군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의병의 가장 큰 문제인 지휘 및 군 조직을 어느 의병보다
잘 갖춰 최신예의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맞아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의 위력적인 의병 활동을 했으며,
또한 산남의진의 활약에 자극받은 전국의 의병들이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을 도모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했으며 산남의진에 참여한 많은 의병이
1910년 국권피탈 이후 간도로 건너가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 세력의 중추를 이루어 결국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봄을 맞이하면서 산남의진에 참여한 우리 역사의 선각자이신 의병들의 희생을
기리고 그 숭고한 뜻을 받드는 시간을 마련하여 보는 시간을 한번 가져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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