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처가살이하면서 제자 양성을 했던 남명 조식 선생의 흔적을 산해정에서 찾다.
제9기 김해시 SNS 서포터즈 조윤희
역사책 속의 인물인 남명 조식 선생의 흔적이 대동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달렸던 날.
그날은 하늘이 흐리고 을씨년스러워 다른 날 다시 올까 하다가 온 김에 둘러보기로 하고 길을 따라갔었는데 어느 작은 마을길로 접어들면서
외부와는 좀 동떨어진 세상으로 진입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고요한 곳에 다다르게 하더군요.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산해정길 123-23(지번. 대동면 주동리 737)에 있는 산해정으로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도착하니 몇 대의 차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나왔고, 주차를 하고 내리면서 주차장에까지 손질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 모습을 만났습니다.
전체적으로 단정한 선비처럼 보이는 외관이 처음 찾아왔던 흐린 날과 달리 며칠 뒤 맑은 날일 때 만나는 모습이 더 와닿아서
맑은 날의 사진을 사용했답니다,
흐린 날도 좋았지만 맑은 날은 구김살 없는 모습으로 맞아주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서원은 동쪽에 까치산, 서는 돗대산, 북은 복호산이 끼고 있어 멋진 풍수지리로 감싸고 있답니다.
'산해정에 대를 심으며
대는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까?
소나무가 이웃이 되어 있는데
바람 불고 서리치는 때 아니더라도
싱싱한 모습에서 참다움 볼 수 있네'
산해정 입구에서 만난 조식 선생의 시비를 보았습니다.
시 속에 대나무 같은 모습의 남명 선생을 그리게 하더군요.
출입문인 외삼문인 진덕문(進悳門)에서 진덕(進悳)은 덕으로 나아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선비의 학문 수양과 교육의 의지가 걸려있는 현판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도착했었던 날에는 산해정(山海亭)의 입구가 열려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무리가 없었답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처음 방문한 이후로 몇 번을 더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닫혀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라는 말을 썼답니다.
외삼문인 진덕문에서 보이는 신산서원의 편액과 자잘한 글씨로 써진 선비들의 이름이 방문자를 반겨주더군요.
왜구의 침탈이 빈번하여 양반들이 거주하지 않았던 김해에 남명이 산해정(山海亭)을 세워 강학하자 비로소 유교의 풍속이 정착하였다고 하지요.
조선시대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30년 동안 학문과 덕을 닦으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에서 선비의 모습을 따라 과거로 함께 다녀오실까요?
‘산해정(山海亭)’이라는 이름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는 뜻으로, 학문을 닦아 경지가 높아지면 경륜과 도량이 바다와 같이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여 쓴 것이라는군요.
1593년(선조 21)에 서원으로 착공했으나 왜란으로 중지된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완성하여 신산서원이라고 하였고 같은 해에 ‘신산(新山)’이라고 사액되었다지요.
신산서원의 흐름을 들여다보면 1818년 서원 옆에 산해정을 복원하였으나 서원철폐령 때 함께 훼철되었으며, 1890년 서원이 있었던 터에 산해정을 복원하고 1924년과 1949년 및 1972년과 1993년에 보수하였다고 해요. 신산서원은 1588년 건립이 추진되었으나 완공 전에 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9년 산해정 자리에 중창하여 1868년 또는 1871년 훼철 때까지 존속하였지요. 그 후 산해정만 복원했다가 1999년 이를 확충하여 신산 서원과 산해정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데 여기에 남명과 송계 신계성을 향사하고 있답니다.
산해정(山海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최근에 이곳에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당신도 한 장의 역사에 기록되게 해 달라고 하시던 관리자님께서 포즈를 잡아 앉으시더라고요. 다른 렌즈를 갖고 가지 않았던 관계로 얼굴이 또렷하게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으시다고 해서 서원과 함께 기록을 남겼네요~~~ㅎㅎㅎ
관리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곳 산해정 관리는 김해 시청 가야사복원과에서 하고 직접적인 간섭은 김해향교에서 한다는군요.
산해정
주소 : 김해시 대 동면 산해정길 123-23
(지번. 대동면 주동리 737)
연락처 : 김진을 : ☎055-331-6232 / H.P. 010-357-6185
김해시청 가야사복원과 ☎055-330-3931
개방일 : 주 4일 개방함. (금, 토, 일, 월)
조식과 신계성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인 신산서원(新山書院)은 1609년(광해군 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과 신계성(申季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 같은 해에 ‘신산(新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1616년(광해군 8)에는 신계성(申秀誠)을 추가 배향하고 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은 복원하지 못하였다가
이후 사림의 공의로 조식이 제자들과 강학하던 곳인 산해정(山海亭)만 중건하였지요. 이 산해정은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로 되어 있답니다.
전면부에 고주초석을 두고 침실부에 고이반자를 설치한 것이 이 건물의 특징으로서
강학을 하던 명륜당은 2004년 7월부터 2005년 3월까지 해체 보수작업을 하였다고 해요.
남명 조식 선생이 강학을 했던 이곳은 선생의 처가 동네였다고 하지요.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의 동재인 환성재(喚醒齋), 전면 3칸의 건물로 검소함이 묻어나지요.
30세부터 45세까지 처가인 김해에 살며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정립하고 제자를 길렀던 곳인 산해정에서의 남명 조식의 경(敬)에 바탕을 둔 정신 수양과
의(義)를 기반으로 한 실천 정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조선 중종 때 학자인 조식(曺植)이 이곳 신산(新山)의 경치를 사랑하여 정각을 세워 산해정이라 이름 짓고 제자들을 강학한 곳이었지만 조식이 별세한 뒤에 제자들이 정자 동쪽 기슭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워 봉사했답니다.
마음속에 의로움을 쌓는다는 뜻을 가진 서재 유위재(有爲齋)는 동재와 마주하면서 학문을 배우러 온 학생들의 숙식과 생활관에 해당하겠지요.
남명 조식 선생은 성리학 중에서도 실천적 성리학을 강조하며 제자들을 길러 내었고 그의 정신을 계승하며 실천하여 구국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시죠?
선생은 평소에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과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하는데,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정신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고 해요. 그의 꼿꼿한 기개를 짐작할 만합니다.
17세기 이전까지의 조선시대는 남녀 재산권이 평등했다고 해요. 즉 아들과 딸, 장자와 차자 모두 재산 상속에서 차별받지 않았던 것이지요. 17세기 이후
장자상속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자녀 균등 상속이 지배하는 사회였던 까닭에 처가살이는 어쩌면 재산 증식은 물론이고 학문과 정치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좋은 경제적 기반일 수 있었을 테죠.
숭도사(崇道祠)는 도학과 도덕을 숭상한다는 뜻으로 사당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답니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도 장가를 잘 갔었던 것 같습니다. 22살 때 남평 조씨 조수의 딸에게 장가를 갔는데, 처가는 김해에서 넉넉하게
살아가는 지역 지식 계층(在地土族)이었던 모양입니다.
의령 자굴산에서 공부하던 남명은 30살(1530년)에 처가인 김해 신어산 아래 탄동(炭洞)으로 이사를 하여 처가살이하는 동안 학문의 깊이를 더하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선비로서 칼을 품었다고 해요.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과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 선생이 병향 되고 있는 숭도사를 돌아보며 지숙문(내삼문)으로 서원 쪽으로 내려옵니다.
임진왜란 때 수로왕릉이 도굴되었다는 소식에 피란지 함양에서 돌아와 10명의 장정들과 함께 파헤쳐진 무덤을 복구한 허경윤이 있는데 그의 위패를
봉안한 구천서원에 봉안하고 서원 오른편에 경의(敬義)라고 적힌 서원 복원기념비가 있답니다.
경의(敬義) 두 글자는 평생에 걸쳐 한 말로써 옳고 그름을 아는 자기 수양 방법인 경(敬)과 그것을 실천하는 의(義)를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했었던
남명 선생의 제자 허경윤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히 의분에 찼을 테고 불의에 항거한 그의 행동은 왕의 무덤을 보호하였던 용기로 드러났던가 봅니다.
돌 한 단을 받친 바닥 위에 세운 서재의 입구. 대청마루의 손질이 있어야 할 듯...
서른여섯 살에 삼가현 서간에 살던 서암 정지린이 맨 먼저 찾아와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 남명이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주위로 명성이 퍼져나가자
도구 이제신, 입재 노흠, 원당 권문임, 청강 이제신 등이 배우러 왔다고 해요.
남명은 배우려고 모여든 제자들을 늘 격려하며 스스로 분발하며 공부하도록 이끌면서,
“공부하는 것은 강물을 거슬러 배를 저어 올라가는 것과 같다. 한 치를 놓아두면 한 길이나 미끄러져 내려간다”라고 하며 공부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네요.
산해정에 머무르는 동안 남명은 바닷가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을 여러 번 보았던 경험은 제자들에게 왜적을 향한 대비책을 생각하면서 국방 의식을
고취하고 유사시 대비할 수 있도록 힘쓴 까닭에 수많은 의병장이 배출되기도 했답니다.
화장실 문에 달린 고리가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들어 담아봅니다.
산해정은 동부 경남의 유적 중 남명 조식과 관련한 유일한 유적이며, 그의 학문과 사상이 정립되던 시기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는데,
철저한 자기수양인 경(敬)과 실천의 의(義)를 행동으로 옮긴 지성인이었으며, 국방을 걱정했던 문과 무를 겸비한 학자였으며,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을 아끼지 않은 현실 비판자이기도 한 남명 조식 선생의 흔적을 이곳 산해정에서 생각할 수 있어서 감사했답니다.
산해정 앞에도 겨울의 시린 시간이 지나가고 산수유나무에서는 묵은 각질을 벗겨내면서 새 삶을 노랗게 터뜨려 내려 합니다.
맑은 날 몇 번 찾아갔을 때 닫혀 있었던 문을 열려면 연락하라고 적혀 있던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하시던 김진을
어르신께서 내일은 퇴원하니까 문을 열어놓고 있겠노라 하시면서 몇 번이나 또 미안하다고 하셨더랬지요.
'어르신, 감사합니다.
신경을 너무 많이 써 주셔서 제가 오히려 송구하며 감사했습니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겨울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요즘 봄은 저만치서 매화 향기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대동면 산해정에서 김해로 돌아가는 길에 보호수로 지정된 300여년 된 무화과나무를 보았습니다. 저 나무에 푸른 잎이 곧 돋아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며 살 보드레한 꽃이 가지마다 고개를 내밀겠지요.
그러다가 가을에 노랗고 향기로운 모과가...
회전하고 흐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김해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던 남명 조식 선생의 걸음으로 산해정을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나로부터 물려줄 내일은 무엇일지 자신을 돌아봄도 좋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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