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을 물리고 고향 합강에 침거하던 유팽로는 신하들의 강력한 천거를 통해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복귀한 즉시 임금께 다음과 같은 서릿발 같은 상소를 올립니다.

[ 천체의 운행이 흐트러지고 한여름에 눈이 내리는가 하면 전국 각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하늘이 주시는 경고입니다. 성상께서는 제사를 지내거나 궁궐을 옮겨서 그것을 달래려 하지만 무너진 덕을 바로 세워 하늘을 감응케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ㅇ임을 아셔야 합니다.

변란의 기운이 온 나라를 덮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그런데도 조정은 무사태평하고 관원들 사이에서는 뇌물이 만연하며 관아의 창고는 텅텅 비어 있어 고을 수령과 도적을 구분할 수 가 없는 지경입니다. 만약 오늘이라도 적이 쳐들어 온다면 어떻게하시렵니까. 하루빨리 영을 내려 나라의 기강을 똑바로 세우소서.]

홍문관 박사 유팽로의 거침없는 간언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모든 것을 왕의 탓이라고 말하는 불충을 크게 물어 벌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선조 임금 스스로 생각해봐도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서 최 말단인 정9품 학유로 좌천시키고 벼슬은 유지하는 선에서 일단락을 지었다.

그럼에도 임금을 향한 유팽로의 가시돋친 상소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 성상께서는 왜 신하가 목숨을 걸고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십니까. 왜 이랬다저랬다 하십니까. ] 속좁은 선조임금은 유팽로의 이런 도발에 열을 받긴 했지만 아무일 없었던 것 처럼 넘어갔습니다.

유팽로가 진정한 충신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팽로의 뇌리를 짓누르고 있었던 불길한 예감은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1592년 4월 14일(음력) 왜군의 선발대가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사흘후 쉬지 않고 말을 달려 한양에 도착한 진주 부사 김시민의 아들 김시백으로부터 왜군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직접 전해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구해 곧장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조정 중신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선조임금은 다급하게 유팽로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떠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유팽로가 고향 합강 지척에 있는 순창 관아에 도착해서 보니 말도 안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한 험상궂은 사내가 장검을 빼어 들고 소리쳤습니다. ”이나라 조선은 이제는 끝났오. 부산포에 이어 곧 순천포에도 왜군이 쳐들어올 것이고 머지않아 여기까지 들이닥칠 것이요. 우리 같은 상것들이야 양반의 나라든 왜놈 나라든 잘 먹고 잘 살게만 해주면 그만이지 무슨 상관 있겠오. 왜군과 손이 닿아 있는 자가 말하기를 전라도 고을을 빼앗아 바치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니 당장 순창 관아부터 쳐서 우리들의 앞날을 도모합시다.“ 그의 말에 동조하는 불한당들의 함성이 순창 하늘에 쩡쩡 울려 퍼졌습니다.

모여 있는 자들의 면면을 보니, 더러 중이나 백정의 복장을 하고 있는 자들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 불량배짓이나 하던 토적집단이었습니다. 유팽로는 눈앞에 양반이 보이면 당장이라도 패대기를 쳐 버릴 것 같은 분위기로 술렁거리는 무리 한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홍문관 학유 벼슬을 하고 있는 옥과 합강사람 유팽로라고 하오. 왜군이 부산포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에서 말을 달려 곧장 달려오는 길이요. “ 선동하던 사내가 유팽로의 목에 칼을 겨누며 소리쳤다. ” 이 양반놈부터 베어버리고 관아로 쳐들어갑시다.“

그때 전라도 전역에서 호걸로 이름을 날린 남원 사람 양대박이 그의 수하들과 나타나 상황을 진정시키고 유팽로는 진정어린 연설로 500명의 장정을 설득하여, 그날 밤 곧장 의병을 조직했습니다. 자칫 가왜(가짜 일본군)로 전락하여 일본군의 앞잡이 역할을 할뻔한 이들이 한순간 나라를 지키는 의병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이들은 임진왜란 최초로 결성된 의병으로 금산전투를 통해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아선 호남창의군의 뿌리나 다름없습니다.

유팽로 장군이 태어난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이렇게 멋진 유팽로 장군이 태어난 곳은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입니다. 그곳에는 임란최초의 의병장 유팽로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도산사가 세워져 있습니다. 유팽로 장군의 위패는 여기 뿐만 아니라 광주에 있는 표충사 그리고 금산 중용당에도 모셔져 있습니다.

이곳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 도산사를 비롯한 내삼문 외삼문이 있고, 유팽로 장군과 부인의 충심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정렬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유팽로 장군의 생가가 있던 곳에는 6살때 썻다는 시가 표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합강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뒤에는 옥출산이 있다네

바라건데 강산의 수명을 빌려

어버이를 기쁘게 하고자 할 뿐이네

6살 어린이가 이렇게 5언 절구 한시를 지은 것을 보면, 어려서 부터 유팽로 장군은 무척 영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호남 의병을 조직할 준비를 어느정도 마친 유팽로는 양대박과 함께 고경명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행과정을 소상히 설명합니다.

” 일이 이쯤 이루어졌으니 이제는 영감께 호남의병대를 이끌어 주실 것을 감히 청합니다. 영감의 이름석자 만으로도 호걸이 구름처럼 모일것이요. 왜적은 꼬리를 사리고 도망을 칠것입니다.“

” 머리가 희끗한 노인인 내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하지만 나라를 위한 충정과 의를 세우는 기백 만큼은 젊은 사람 못지 않다네. 월파가 자네가 지금까지 온갖 고생 다하며 의병을 모으고 있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네. 왜군의 본진은 주상전하의 어가를 쫓아 파죽지세로 북진할 것이네. 우리는 근왕병으로서 북진하는 왜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진격 속도를 늦추고 호서와 한양 즉 조선의 서쪽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하네. 현실적으로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호남 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하네. 호남이 뚫리면 조선이 무너지네.

월파가 이만큼 공을 들여 창의(의병이 일어섬)의 기틀을 마련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나서겠네. 호남의 모든 사림에게 통문을 돌리고 직접 만나서 함께 창의할 것을 독려하겠네. 각자의 노비만 데려오더라도 수천의 병력을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월파와 청계는 그것에 대비하여 병참을 정비하시게."

유팽로 장군과 부인을 모신 정렬각

마침내 8,000명에 이르는 의병이 담양 금성산성에 모였습니다. 대장군 고경명은 우부장 유팽로 좌부장 양대박과 함께 단상에 올라 격문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하였다. 장수들은 헤매고 수령이라는 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서 저 왜적 놈들에게 임금과 부모를 내맡겼으니 이 어찌 말이 되는 노릇인가. 나 고경명은 백발 노인이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충성을 다짐하였다. 눈물을 뿌리며 군중에게 맹세하는 도다.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천둥과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고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뛰어넘을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는 절대로 강박해서 응하거나 억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신하로서의 충성된 마음이 함께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혹은 무기를 빌려주고 혹은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난 의병들이여, 오직 의로 돌아가서 이 전쟁을 평정하기 위해 함께 행동하자. 호걸들이 왜적을 물리치고 세상을 바로 잡는 날, 임금께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래서 마음을 터놓고 충심으로 고하는 바이니 반드시 승리하여 왜적을 물리치자. ]

유팽로 장군 위패를 모신 도산사

호남 연합 의병은 금성산성을 출발한지 20일만에 금산에 본진을치고 왜적과 대치하였습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 6진이 금산성을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왜군 본대와 처음 마주하는 상태라서 진중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운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양대박 장군이 급병을 앓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전주로 달려가 양대박의 임종을 지킨 유팽로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듬직한 용장 김덕용도 갑작스런 형님의 발병으로 전주에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두 용장이 없는 상태에서 전투를 치러야 하는 유팽로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다행이 또 다른 용장 승려 영규가 승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달려와 주었으니 그나마 위로가 되었지요.

호서 의병장 조헌에게도 연락병을 보내, 서로 힘을 합쳐 금산성을 탈환하자고 제의하였고 조헌도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전라 방어사 곽영이 이끄는 관군까지 합류하여 의병대 맞은편에 진을 꾸렸습니다. 이렇게 완벽한 대오를 갖추게 되면서 호남의병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습니다.

그래서 곧장 공격을 개시하여 금산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유팽로는 한사코 반대하였습니다.

“ 적의 병력은 2만, 게다가 우리보다 월등한 무기인 조총을 갖고 있소. 우리의 병력은 관군까지 합쳐 9천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공성전을 펼쳐야 하니 훨씬 더 불리합니다.

그러니 적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면 그때 공격하여 진격을 차단하고 전주성과 후방의 의병들이 방비를 완벽하게 갖출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으로도 우리의 역할입니다. 그런 연후에 호서 의병이 합류하면 그때 일제히 공격하여 왜적을 섬멸시키면 됩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

하지만 그동안 몇 번의 작은 승리를 경험했던 터라 진중에서는 왜군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대장군 고경명 조차 신중론보다는 주전론에 무게를 싣고 있어 유팽로로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유팽로 장군의 생가터

마침내 관군과 의병은 좌우로 나누어 금산성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왜군이 조총을 쏘아대며 반격하자 혼비백산 후퇴하기에 급급했지요. 이런 산발적인 전투가 온종일 반복되었습니다. 밤이 되자 소수의 기습병력을 투입하여 성 밖 민가에 불을 지르고 진천뢰를 성안으로 던져서 창고에서는 불길이 솟아오르고 왜군 진영이 아비규환에 빠지는 것을 보고 의병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오면서 세찬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간밤의 승리에 고무된 의병진영은 적과 정면으로 부딪혀도 승산이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팽배했습니다. 날이 게이면서 이번에는 어제와 달리 적병이 먼저 성 밖으로 나와 금산성에 바짝 다가선 관군을 공격했습니다. 관군은 이때다 싶어 적을 격퇴하면서 추격하는 순간 수천의 적병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관군을 에워싸고 조총을 난사했습니다. 그러자 관군의 전열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사력을 다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자, 왜군이 맹렬하게 추격했습니다.

관군을 구하기 위해 고경명이 부대를 이끌고 나가려 하자 유팽로가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 필시 뒤에 매복군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들어가면 전멸입니다. ” “ 하지만 어찌 아군이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붙잡을 새도 없이 선봉에선 고경명과 의병들은 말을 몰아 적진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적들이 조총을 쏘아대자 관군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고 이를 보고 있던 의병대의 전열도 흐트러지면서 적군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습니다.

유팽로가 함께 있던 상머슴에게 물었다. “ 대장군께서는 어디계시는가.” 상머슴은 주군을 살리기 위해 거짓으로 아뢰었습니다. “ 이미 몸을 피하셨습니다. 나으리께서도 얼른 피하십시오. ” 그말을 듣고 말머리를 돌리려는 순간 적에게 둘러싸여 분전하는 고경명 장군이 눈에 띄었습니다. 상머슴이 제지할 겨를도 없이 유팽로는 번개처럼 말을 달려 전장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 유팽로를 보고 고경명이 외쳤습니다. “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후퇴하라.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는가. ” “ 아닙니다. 저는 죽어도 장군을 따르렵니다.”

일본군의 우세한 병력과 무기에도 불구하고, 호남 의병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오전부터 시작된 전투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어 왜군들의 시체도 산처럼 쌓여 갔습니다.

참전한 의병이 전멸하면서 비로소 피비릿내 나는 사흘간의 전투는 끝났습니다. 무수한 사상자를 낸 왜군도 금산성을 버리고 퇴각했습니다. 비록 전투에서는 졌지만,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차단할 수 있었고, 이순신 장군이 안심하고 남해 바다를 지킬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의마총

합강의 드넓은 들녘 한편에는 의마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유팽로 장군이 타고 있단 말이 그의 수급을 물고 와서 곡기를 끊고 굶어죽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말무덤입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임금을 향해서도 직언을 아끼지 않고,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 결연히 싸우다가 불꽃처럼 산화한 의병장 유팽로 장군은 우리나라 역사의 하늘에 샛별처럼 빛나는 진정한 충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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