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50년전 울산 동구는 어땠을까 ③ <어선진수식>
1960~70년대 어선진수식은 흥겨운 동네잔치
글·그림 김광열 작가
어선 진수식은 육지에서 건조를 마친 배를 처음으로 바닷물에 띄울 때 하는 행사인데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풍습이다.
진수식에는 선박과 선원의 안전을 비는 안전 기원제와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의식 등이 진행된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배를 건조할 수 있는 곳은 방어진 철공 조선과 동진마을 초입에 있는 청구 조선 정도였다.
각 선사에서 일 년에 몇 번 정도 하는 행사라 진수식 하는 날은 동네가 요란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웅성거렸다. 오방색 떡은 언제 던져주는지, 떡 속에 돈이 있는지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조선소 내 육상에서 배 건조 작업을 마친 선박은 뱃머리 좌우에 배 이름을 새겼고, 선상 구조물에 매달린 만국기들은 바람에 펄럭이며 진수식을 기다렸다.
진수식에 차리는 음식은 술, 돼지머리, 떡, 과일, 오방떡이었다. 진수식의 하이라이트 음식은 오방색 떡이었는데, 바구니마다 수십 개씩 담아 놓았다.
선원과 진수식을 진두지휘하는 관계자 모두가 승선하면 바로 진수식을 진행했다. 진수식을 하는 시간은 보통 오전 11시 정각 또는 12시 정각이었다. 건조 완료된 배는 빠른 속도로 레일 위를 미끄러져 물살을 가르면서 바다를 향해 내려갔다. 내가 본 날의 진수식 주인공은 목선 댕구리 배(저인망 어선)이다.
진수식의 하이라이트는 오방색 떡을 행사장과 바닷가 주변에 있는 구경꾼을 향해 마구 던지는 것이다. 선수에 서서 오방색 떡을 던지는 사람은 선주도 선장도 아닌 힘 있고 패기 넘치는 조선소 현장소장이었다.
어떤 떡은 해변에, 어떤 떡은 바다에 떨어졌다. 던져진 떡을 줍기 위해 구경꾼은 일제히 “와아아” 하며 해변으로, 바다로 뛰어갔다. 처녀, 총각, 학생, 꼬마 할 것 없이 먼저 줍는 사람이 주인이었다. 어떤 사람은 세 개, 어떤 이는 두 개, 어떤 사람은 하나를 주워 쥐고는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오방색 떡 속에는 돈이 들어있었다. 보통 1원에서 3원까지 들어있는데, 어떤 떡 속에는 5원짜리도 가끔 들어있었다. 그것을 주운 사람은 횡재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소풍 때 받는 용돈이 2~3원 정도였을 때라 5원이면 큰돈이었다.
배고픈 시절이라서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진수식은 짧은 시간 순식간에 벌어지는 축제였다. 동작이 빠르지 못하거나 앞사람이 먼저 주워버리면 떡을 한 개도 못 줍는 때도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떡 맛은 볼 수가 있었다.
앞, 뒤, 옆에서 주워온 떡을 쪼개고 갈라서 떡 속에 돈을 찾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빈손으로 있는 사람을 보면 누군가 떡 쪼가리를 건네주었다. 많은 떡이 바다에 던져져 바닷물이 묻었지만, 짠맛은 별로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바닷물에 빠지자마자 건져낸 탓도 있겠지만, 당시 바닷물이 깨끗했기에 맛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또한 먹을 만한 간식거리가 부족한 시절이었기에 무엇을 먹든 다 맛있었다. 그야말로 건네받은 오방색 떡은 꿀맛이었다.
이것이 울산 동구 방어진 동진마을 어선 진수식 때의 모습이다. 당시 현대 조선이 들어오기 전의 진수식이고 그 당시 청구 조선은 주로 목선을 건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방어진항의 댕구리 배는 목선이 대부분이었고, 목선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 2023년 대왕암소식지 가을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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