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일 전
하동의 父子 독립운동가 김홍권·김병성
불러보지 못한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그 큰 뜻을 기억하며 삽니다
사천시 사천읍에 있는 민화 전문 화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방문자의 눈높이에 딱 맞춰 걸린 사진 한 장이 있다.
하동군 출신 하우(何尤) 김홍권(金弘權) 독립지사의 흑백 얼굴사진이다.
손녀인 민화 화가 김성숙(78) 씨가 조부에 대한 자부심으로 걸어둔 사진이다.
거뭇한 콧수염에 하얀 한복 깃, 젊디젊은 청년이 아련한 눈빛으로 방문객을 바라본다.
1919년과 2025년, 시공을 넘나드는 조우가 이루어진다.
김 씨에게는 또 한 장의 흑백사진이 있다.
사진의 주인공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김병성(金炳成) 독립지사이다.
첫눈에 알아본 사진 속 나의 아버지
1997년 3월 진주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김성숙 씨는 진주시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던 향토사학자 추경화 선생 주최의 ‘충효사진전시회’를 관람하러 갔다. 독립운동을 했던 조부와 부친의 이야기를 집안 어른들을 통해 귀동냥처럼 들어왔던 터라 관심이 갔던 전시였다.
그곳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김 씨가 생전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 김병성 지사의 사진을 보게 됐다. 사진 설명에는 할아버지 존함인 ‘김홍권’이라고 돼 있었지만, 김 씨는 자신과 닮은 아버지를 첫눈에 알아봤다. 그렇게 김성숙 씨가 김홍권 지사와 김병성 지사의 유족인 것이 알려지면서 오래전 추서됐지만 수령자가 없었던 할아버지의 건국훈장도 받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 훈장이 추서됐다는 것을 들었지만, 찾을 생각을 안했다. 어머니와 2명의 언니들은 지난한 세월의 영향으로 조부와 부친에 대한 것은 다 묻어두자고 했다. 어디 가서 얘기하지도 말라고 했다.”
가족보다 조국을 위한 마음으로 살다 간 조부와 부친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아픔이 되어 남은 가족들은 두 지사에 대해서 굳게 입을 닫아왔다.
수만 평 땅 팔아 독립운동에 투신
김성숙 씨의 할아버지 김홍권 지사는 1892년 1월 25일 경남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에서 태어났다. 1908년 하동보통학교에 입학한 이듬해 1909년 비밀결사단체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대동청년단은 남형우·안희제·이원식 등 80여 명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이후 1917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1919년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메이지대학 재학생 유경환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그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김 지사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재무위원에 선출되고,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 경상남도 지역의 책임위원을 맡게 된다. 의정원 의원으로 피임됐다는 사실에서 임시정부 기반 형성에 김 지사가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 지사의 집안은 하동에 수만 평의 땅을 소유한 천석지기였다. 김 지사가 임시정부의 재무위원이 되면서 그 많은 땅을 모두 소작인들에게 매도하며 항일투쟁의 자금으로 바쳤다. 1920년에도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 후 국내로 들어온 선생은 부산에서 산해여관을 운영하며 안희제지사와 연계해 계속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활약을 이어갔다. 타계 전 해인 1936년까지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부친에 이어 아들까지, 대 이은 독립운동
김 씨의 아버지 김병성 지사는 1910년 1월 14일생이다. 부친 김홍권 지사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29년 중앙청년동맹, 고려공산청년회 등의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다 치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5년에도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일제가 공산주의 사상가로 죄명을 기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할아버지 김홍권 지사는 광복 전인 1937년 46세로 타계했다. 정부는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나,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승급됐다. 김병성 지사는 광복 후 1947년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바로 김성숙 씨가 태어나던 해이다. 뒤늦게 202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김성숙 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의 치열하고 가슴 뜨거웠던 생애를 떠올리면 저절로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며 “그 분들의 하루하루가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저리다”고 말했다.
함께한 기억은 없지만, 그 큰 뜻은 남아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태어난 김성숙 씨에게는 당연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만 있다.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놓으면, 아버지가 오셔서 그 돈을 갖고 도망치듯이 가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비서처럼 심부름도 하시고, 일본을 거쳐 상하이로 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다”라고 들었다.
김 씨는 가족보다 조국이 항상 먼저였던 조부와 부친에 대해 손녀와 딸로서, 뭐라고 소감을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어릴 때는 독립운동 가족사가 자랑스럽다고 생각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여관에 식당에 자식들이 잘 살길 바라며 열심히 일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제 앞가림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1997년 충효사진전시회를 통해 우연히 부친의 사진과 만난 후 김 씨는 할아버지 김홍권 지사의 훈장을 수령하고, 광복회 경남서부연합지회 활동을 20여 년간 했다.
“큰 뜻을 품고 자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애쓰셨던 분들이지 않나. 그분들의 후손으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광복회 활동을 했다.”
그 덕분에 2005년 6월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에 조부의 공적을 기리는 ‘애국지사 하우 김홍권선생 공훈비’ 건립을 이끌어 내고, 아버지 김병성 지사에 대한 서훈도 정부로부터 받았다. 김 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데 정성을 쏟아준 추경화 선생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가슴에 사무친 그리움, 세월만큼 쌓여가
“이제 제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 되돌아 볼 일이 많아진다. 한 번도 뵙지 못한 분들이지만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이 한가득이다.
조국에 바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청춘, 그리고 그 큰 뜻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덕분에 오늘날 나도 이렇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지 않나.”
김 씨는 어머니 임종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하동아, 섬진강아, 그리운 내 고향아’라는 노래를 부르셨다. 기운이 하나도 없는, 곧 가실 분이 마지막 구절까지 부르시는 걸 보고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너그 아부지가 오셨다’고 했다. 그때 알았다. 어머니 마음 깊은 곳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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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 발표에 의하면 2025년 3월 기준 경상남도 출신 독립유공자는 총 1476명이다. 창원 출신 188명, 통영 111명, 함안 101명, 밀양 93명, 합천 89명, 하동 70명, 김해 69명, 진주 64명, 고성 55명, 거창 55명, 의령 52명, 양산 51명, 창녕 46명, 산청 42명, 함양 36 명, 사천 31명, 남해 29명, 거제 4명이다. 독립유공자의 출신지는 광복이전 행정구역 기준이어서 부산 83명, 울산 97명, 동래 73명, 언양 1명이 포함됐으며, 경남 출신인 것은 확인됐지만 정확한 시군이 밝혀지지 않은 유공자가 36명 포함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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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보지 못한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그 큰 뜻을 기억하며 삽니다 사천시 사천읍에 있는 민화 전문 화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방문자의 눈높이에 딱 맞춰 걸린 사진 한 장이 있다.하동군 출신 하우(何尤) 김홍권(金弘權) 독립지사의 흑백 얼굴사진이다. 손녀인 민화 화가 김성숙(78) 씨가 조부에 대한 자부심으로 걸어둔 사진이다. 거뭇한 콧수염에 하얀 한복 깃, 젊디젊은 청년이 아련한 눈빛으로 방문객을 바라본다. 1919년과 2025년, 시공을 넘나드는 조우가 이루어진다. 김 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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