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역사 여행, 곡성 관음사, 국보 원통전과 금동관음좌상은 어디에?
이번 역사 여행지는 곡성 관음사입니다.
무려 1700년이라는 유구한 시간 동안
그 명맥을 이어온 천년고찰이며
심청전이 탄생한 발원지이기도 합니다.
창건설화를 기록한 관음사사적기와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들은 관음사가
곡성의 자랑스러운 역사유적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곡성 관음사의 설화와 역사를 기록한 [성덕산 관음사사적기]
곡성군 오산면 성덕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관음사는 서기 300년(분서왕 3) 성덕보살이 금동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창건했다고 알려진 백제 사찰입니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화엄사에 속해 있습니다.
송광사 스님 백매선사가 1729년(영조 5)에 관음사 장로였던 덕한선사가 들려준 이야기와 관음사 상량문에 적힌 내용을 바탕으로 관음사 창건에 대한 내력을 기록한 것이 [성덕산관음사사적기]입니다. 관음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순천 송광사에서 발견된 「성덕산관음사사적기」에 기록된 내용 중 홍장 설화 부분을 소개합니다.
백제 때 대흥 고을에 장님 원량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쁘면서도 효성이 지극한 홍장이라는 딸이 있었지요. 어느 날 마주친 성공 스님은 원량한테 큰 시주를 하게 될 거라는 부처님 현몽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자신이 어떻게 시주를 할 수 있겠냐고 하자, 성공 스님은 부처님이 그리 말씀하셨으니 무조건 시주를 해야 한다며 막무가내였어요. 시름에 잠긴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효녀 홍장은, 시주 대신 자신을 부처님께 바치겠노라며 아버지 만류를 뿌리치고 성공 스님을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나루터에서 진나라 사신을 만났는데 그들은 홍장을 보더니 반가워하며 황후가 될 분이라며 극진히 대하였습니다. 그리고 홍장을 모셔가겠다며 스님에게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를 시주하였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황후가 된 홍장은 지극한 불심으로 중국과 백제의 수많은 절에 탑을 세우고 불상을 시주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정성을 기울여 제작한 금동관음상을 배에 실어 보냈습니다. 백제 땅에 도착한 배가 꿈쩍도 하지 않자 그곳에 불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불상을 옥과현에 사는 성덕이라는 불심 깊은 처녀가 발견하여 옮겨와서 세운 절이 오늘날 관음사입니다. 그래서 관음사가 자리 잡은 산 이름도 성덕산입니다. |
관음사는 순창에서 고흥으로 이어지는
15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곡성군 오산면에 속한
마을과 저수지를 지나 5km쯤 들어간
성덕산 골짜기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산사입니다.
관음사 경내에 들어서면 극락전과
대웅전으로 짐작되는 새로 지어진 전각과
원통전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관음사는 백제 시대 전라도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 가람이었다는군요.
여전히 널찍한 절마당이 옛날의 위용을
짐작게 해줍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
지금의 규모로 작아졌다고 합니다.
해방 이후 곧장 국보로 지정된 관음사 원통전과 금동관음좌상
관음사에는 무량수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었던 원통전이
무수한 전란을 이겨내고 한국전쟁 전까지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씌어진 상량문 기록에
다섯 번째 중수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관음사 원통전은 백제 때 최초로
지어진 전각임이 확실합니다.
원통전 안에 모셔져 있던 금동관음좌상 역시
그만큼 오래되었고 예술적 가치도 뛰어났습니다.
해방 후 정부 수립과 함께 관음사 원통전과
금동관음좌상이 동시에 국보로
지정된 것을 보면 문화유산으로서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귀중한 문화재 원통전과 금동관음좌상이 사라져버린 사연
이 귀중한 문화재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관음사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한국전쟁이 한창일 무렵, 성덕산과 이웃한
백아산에는 빨치산 전남도당이 있었습니다.
휴전 이후에도 극렬하게 저항하는 빨치산 소탕을
위해 어마어마한 화력을 쏟아부었습니다.
서해에 떠있던 미국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전투기들이 수시로 출격하여 백아산 일대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다고 해요.
빨치산 잔당들이 숨어들지 못하도록
관음사 일대에서는 화공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원통전과 금동관음좌상이 한순간에
불구덩이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군사적으로는 불가피한 조치였을지 모르지만
폭격으로부터 해인사 장경각을 구한
김영환 공군 편대장 같은 분이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우리나라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 귀중한
백제의 유물을 우리 스스로 태워버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통탄할 노릇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금동관음불 불두가 발견되어 새로
지어진 원통전에 모셔져 있어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나라에 유일한 관음사 어람관음석불
관음보살은 33가지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중
물고기를 들고 있는 관음보살을
어람관음이라 한다네요.
원통전 앞에는 커다란 물고기를 팔에 끼고 있는
어람관음석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형태의 어람관음석불이 있는 곳은
우리나라에서는 관음사가 유일합니다.
언제 누가 세운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람관음석불도 하루속히 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다리와 누각을 겸한 금랑각은
한눈에 봐도 아름답습니다.
한국전쟁 때 금랑각도 불에 타버려
이후 불사를 통해 다시 세웠습니다.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 낙산사 청련암 같은
관음도량은 대부분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관음사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금빛 파도라는 뜻의 '금랑각'이
바다를 대신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랑각은 창건 당시부터 줄 곳
이곳에 세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격랑의 역사가 삼켜버린
관음사 원통전과 금동관음좌상!
최대한 원형으로 복원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관음사와 함께한
곡성 역사여행이었습니다.
■ 관음사 여행 노트
▷ 관음사 입구에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자동차 경내 진입을 삼가 주세요.
▷ 관음사 마을까지 옥과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농어촌 버스를 운행합니다.
▷ 소조관음상은 원통전 안에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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