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의 격동적인 역사를 열었던

후백제를 세웠으나 아들 간에

왕위 계승 문제로 몰락을 초래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후백제의

시조 견훤의 왕릉이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낮은 언덕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논산 훈련소인 '연무대'에서 편도 1차선의

좁은 왕릉로를 따라 강경 쪽으로 향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견훤왕릉 표지판을 보고 역사책에서만 배웠던

후백제의 시조 견훤의 왕릉이

이곳에 있었나 싶어 반가운 마음으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왕릉으로 올라갔습니다.

주차장 앞으로 모내기를 마친 푸른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멀리 보이는 산과

낮게 깔린 구름은 평온하기만 한데

1천여 년 전에 이곳에 잠든 한시대의 영웅이

남긴 애환을 떠올리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주차장에서 바로 견훤왕릉 공원으로

이어지는 넓고 깨끗하게 정리된 공원이 있어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장마가 멈추고 갠 하늘과

얕게 내린 구름이 상쾌한 바람과 함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줍니다.

낮은 언덕 아래에 아담하고

예쁘게 지어진 교회가 있어

시골마을의 정겨운 모습으로 보입니다.

교회의 바로 옆길로 올라가는 오솔길에

'견훤왕릉'이라는 표지판이 있어

왕릉으로 오르는 길을 쉽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높지 않은 언덕길은 돌계단으로 되어 있어

걷는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언덕 마루에 올라서니 울창한 숲속에

잘 정돈된 풀밭이 있어 이곳에서

소풍 나와 쉬면서 역사 공부도 하면

일석이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풀밭에 벤치가 놓여 있고 벤치에 누워

독서하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후백제 왕 견훤의 묘로 알려진 이 무덤은

정확한 문화유산 명칭은

'전(傳)견훤묘'라고 합니다.

이 묘가 견훤묘라는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해서 견훤묘라고 전해 내려오는 의미로

전견훤묘라고 문화유산에 기록하고

보존하고 있답니다.

비록 견훤왕릉이라고 '전해진 묘'이긴 하지만

역사적 인물인 견훤을 기리고 그의 흔적을

보존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견훤은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등장하여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고

수도를 완산주(지금의 전주)로 삼았습니다.

그는 지방 호족의 대표적 인물로서

후삼국시대의 중심인물이었는데

고려의 왕건, 태봉의 궁예와 함께

후삼국을 형성하고 신라를 공격하여

경순왕을 죽이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후백제왕견훤릉(後百濟王甄萱陵)'이라는

묘비가 서있습니다.

견훤의 후손인 견 씨 문중에서

이 묘비를 세웠답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견훤이 죽을 때

'완산(전주)이 그립다'라며 '내가 죽거든 전주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묻어덜라'는

유언을 남겨 이곳에 묻게 되었다고 합니다.

봉분의 크기는

지름 17m, 둘레 70m, 높이가 8m입니다.

견훤 왕릉은 단순히 한 인물의 무덤을 넘어

후삼국 시대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견훤이라는

인물의 파란만장한 삶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견훤은 민중 반란과 지방 세력의

자주성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고

견훤왕릉은 호족 중심의 지방 분권 시대,

즉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릉 주위의 공원은 넓지 않은 면적이지만

잘 정돈된 풀밭이 편안함을 주고

큰 나무들이 서있어 아늑하게 느껴집니다.

서쪽으로 활짝 열린 환경이

한여름의 쉼터로 알맞은 장소입니다.

견훤의 유물이나 유적으로 여길 만한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견훤의 생애를 돌아보며

우리의 역사를 되새겨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은 견훤이 그리워하던

전주의 모악산이 아니가 싶습니다.

견훤은 신라 경문왕 7년(867)

상주 가은현(현재 문경시 가은읍)의

농민 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자라

진성여왕 대에 신라의 국정이 혼란해지자

889년 경부터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900년에 후백제를 세우고

후삼국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했습니다.

견훤왕릉에서 다시 내려오는 오솔길에

잘 깔아놓은 돌길 덕분에 편하게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견훤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왕위를 넷째 아들 금강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첫째 아들 신검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의 반란으로 한때 경쟁자였던

고려 태조 왕건에게 의지하고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정벌하는데

앞장서서 아들과 싸웠다고 합니다.

후에 병으로 사망하는데

나이는 70세였다고 합니다.

견훤왕릉을 내려오면서 한 시대의 영웅도

권력 승계의 잘못으로 아들에게 버림을 받고

큰 꿈을 이루지 못했던 견훤의 비극적인 삶에서

권력의 무상함과 인간적인 욕망의

갈등을 보게 됩니다.

한때 견훤이 호령하던 평야와 멀리 보이는

산들이 조용히 역사를 기억하게 합니다.

견훤왕릉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title":"후삼국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후백제 왕 견훤왕릉","source":"https://blog.naver.com/nscity/223921919146","blogName":"논산시 공..","domainIdOrBlogId":"nscity","nicknameOrBlogId":"논산시","logNo":223921919146,"smartEditorVersion":4,"cafeDisplay":true,"blogDisplay":true,"meDisplay":true,"lineDisplay":true,"outsideDisplay":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