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영화 <탄생>과 김대건 신부님 길
조선 근대의 길을 열어젖힌
청년 김대건의 위대한 모험
영화 <탄생>
영화 <탄생>과 김대건 신부님 길
2023년 익산 방문의 해!
영화<탄생>과 더불어 김대건 신부님 길 함께 걸어보지 않으실래요?
2022년 영화 <탄생>이 개봉했다. 2021년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기념 인물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선정되었다. 세계기념 인물은 역사적·세계사적으로 인류에게 큰 영향을 긍정적으로 미친 인물을 선정한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종교인 중에는 마더 테레사 수녀에 이어 두 번째 종교인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정약용, 허준에 이어서 세 번째로 세계기념 인물이 되었다.
기자는 개봉 당시 무주에서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무주산골영화관에서 봤다. 57석 규모의 작은 영화관에서 이웃들과 봤다. 행여 자리가 없을까 예매까지 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오붓하게 봤다. 흥행 면에서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나 보다. 그런들 어떠리. 책도 두고두고 오랫동안 읽혀야 할 책이 있듯이 영화도 그럴 것이다. 영화 <탄생>이 바로 그런 영화다. 오랫동안 두고 보고 또 봐야 할 영화다.
아직도 영화 <탄생>을 보지 않았다면 강추한다. 영화 <탄생>을 보고, 익산 ‘김대건신부님 길’을 꼭 걸어 보시기 바란다.
기자가 ‘김대건신부님길’을 걸으며 기자의 화두는 ‘내게 그런 시간이 온다면 나도 과연 순교할 수 있을까?’였다.
기자는 가끔 자신에게 묻곤 했다. ‘독립운동 할 수 있었을까?, 빨치산이 될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한 답은 ‘It’s Okay!’다. 현실의 문제였으므로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순교’만큼은 그리 쉬운 답이 아니다. 지금도, 글쎄?
기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혹여 종교적 편견을 말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대부분의 자료를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연구하는 자료들을 수집해서 기사를 쓰기로 했다. 영화 ‘탄생’ 또한 종교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조선의 근대를 열어젖힌 시대의 선각자, 청년 김대건의 삶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한다.
마카오 유학, 불란서 극동함대 사령관 세실의 에리곤호 승선, 아편전쟁, 동서 만주 육상 입국로 개척, 라파엘호 서해 횡단, 백령도 해상 입국로 개척 등 3,574일의 역동적인 모험을 담기 위해 자료조사와 연구, 국학진흥원의 검수를 거쳤다. 서울을 제외한 충남 논산, 태안, 보령, 충북 단양, 전남 여수, 전북 부안, 강원도, 경남 창원, 경북 문경, 대구, 제주도와 경기도 일대 및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촬영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209280
조선의 천주교는 학문으로 시작하여 자생적으로 생겨나, 사제 없이도 만 명이 넘는 신자가 생긴 종교로 이러한 경우는 대단히 이례적이라고 한다.
한국의 천주교는 교조적 통치로 부패한 조선을 개혁하려는 남인 사림파 학자들에 의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자생적으로 탄생했다. 이를 높이 산 교황 바오로 2세는 1984년 직접 한국을 방문해 무려 103명의 조선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추대했다. 개화기 초기에 성호 이익 계열의 남인 계통 선비들은 백성의 교화보다는 수직적 통치 논리가 되어버린 주자학을 혁파하기 위해, 그리고 관리들의 매관매직과 수탈로 인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실학운동을 시작했다. 남인 사림파 선비들이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구의 과학문명에 눈을 뜨면서 만민평등과 사랑을 담은 천주학을 접하고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천주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기 영(초록교육연대 공동대표, 호서대학교 명예교수)
첫 천주교 박해는 1791년 신해 박해 –진산사건/진산군(珍山郡)에 사는 선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윤지충의 外弟)이 윤지충의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교식으로 제례(祭禮)를 지냈다는 소문-다. 정조 사후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를 비롯해 약 80여 년간 크고 작은 박해가 있었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병오박해에 순교하셨다.
김대건 신부님은 7살까지는 솔뫼성지에서, 7세 이후 골배마실로 이사해서 살았으며, 15세에 은이공소에서 모방 신부를 만나 최양업, 최방제와 마카오로 사제교육을 받으러 떠났다가 1846년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김대건신부님길’은 1845년 그이가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으로 입국하던 중 기착한 화산 나암포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물론 그 당시와 지금은 물길이 달라졌겠으나 그이가 용두포를 지나 멀리 보이는 화산 나암(나바위)포를 향해 저 물길을 따라 항해했으리라!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며 순교자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5년 8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현석문 가를로, 최형 베드로, 이재의 토마스를 비롯한 11명의 조선 신자들과 함께 포교지인 한양을 향하여 라파엘호를 타고 항해하였다. 그러나 폭풍우와 풍랑을 만나 돛대와 키가 파손되어 표류하다가 제주도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배를 정비하여 한양을 향해 다시 출발했지만 반파 상태인 배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자 계획을 바꿔 강경포구에 정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 강경포는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였으므로 번잡하고, 황산포와 낭청포는 나루가 있어 사람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특히 라파엘호는 누가 봐도 중국에서 온 배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기에 배를 숨기기에 좋은 조건을 지닌 아주 작은 나암포 화산 언저리가 착륙하기 알맞은 곳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상해를 떠난 지 42일만인 1845년 10월 12일 밤 8시경 포구에서 좀 떨어진 외딴곳 이곳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출처/ 나바위성지 안내
‘김대건신부님길’을 따라 걸어 도착한 곳이 나바위 성지다. 나바위 성지에는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건조한 실물 크기의 라파엘호가 있다. 라파엘호는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1845년 4월 30일 재물포에서 상해로 가고, 8월 17일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8월 31일 조선으로 돌아올 때 탔던 무동력 목선으로 ‘길을 인도하는 대천사 성 라파엘’이라는 이름을 붙인 배다.
▶ 라파엘호 크기와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페레올 주교가 1845년 10월 29일 강경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와 다블뤼 신부가 1845년 10월 23일 충청도 공동에서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이다. 최근 ‘라파엘호 규모에 관한 고찰’ 연구 논문을 발표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홍순재 학예연구사는 라파엘호 크기를 길이 9.75m, 너비 4.22m, 깊이 1.62~1.94m로 추정했다. 라파엘호 모양은 조선 후기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평저형’이었다. 쇠못은 단 한 개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나무못으로 널판을 이어 만들었다. 서양 배는 모두 방수를 위해 타마유(콜타르)를 발라 배의 틈새를 메우는데 라파엘호는 천이나 얇은 대나무 껍질로 틈을 막았고 갑판도 없다. 배 중간에 나무판자를 대 공간을 세 구간으로 구분해 놓았을 뿐이다. 비가 오거나 파도가 들이닥치면 고스란히 맞고 차오르는 물을 열심히 퍼내야만 한다. 5m 정도 되는 돛대는 2개로 앞쪽은 바로 서 있고, 뒤쪽은 기울어져 있다. 돛 줄은 새끼줄과 칡넝쿨로 만들었다. 손가락 5개 두께의 나무판자 한 개가 키 역할을 했다.
라파엘호는 조선 후기 서해안에서 활동한 전형적인 어선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넓게 펼쳐진 갯벌, 파장이 짧고 가파르고 거센 파도에 적합한 구조이다. 그래서 선박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먼바다 항해가 불가능한 배”라고 했다.
다블뤼 신부도 “신부님께서는 조선 선원들이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아 상해까지 가게 된, 완전히 하느님의 섭리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라며 “망망대해 가운데서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하느님의 자비심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라고 했다.
출처/ 가톨릭정론지, 가톨릭평화신문
순례길에 나선 이들을 만났다. 그들의 뒤에서 천주교 신자가 아닌 나의 기도도 보탰다.
‘오늘 당신을 만나며 참 기뻤습니다. 당신을 알게 되고, 당신의 뜻을 기리는 이 사람의 기도도 받아주소서.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던 시대, 밀알이 되어주신 청년 김대건의 용기와 헌신, 사랑에 감사합니다.’
순례자들 앞에서 ‘취재’라니……. ‘하잘 것 없다’는 생각에 그들의 순례길을 피해 반대로 돌았다.
기자는 그이의 업적을 통해 그이가 가신 길을 톺아 봤다.
#조선순교자 명단
1845년 1월 21일 부제가 되어 조선에 입국, 한양 돌우물골에서 4개월간 머물렀다고 한다. 입국 후 보름간 사경을 헤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생을 교육하는 한편, 조선 순교자 명단(서소문성지 보관)을 작성했다고 한다. 순교자의 이름, 출생지, 어디서 어떻게 순교했는지, 거기다 고문 방법을 삽화로 넣어 기록, 라틴어로 작성하여 주교에게 발송했다고 한다. 그의 그러한 기록은 조선의 순교자들을 후세에 복자, 성인으로 추대하는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전도
김대건 신부님께서 그린 조선전도다, 1840년대에 포교를 위해 그려 해외로 보낸 여러 장의 한국지도는 대동여지도보다 16년 앞선 지도라고 한다. 선교사들이 들어올 안전한 길을 찾기 위해 지도 제작했다고 한다. 그이가 그린 조선전도를 계기로 외국인들이 조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그린 이 지도는 그이가 국사범으로 몰릴 때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 지도는 1855년 발행된 Bulletin de la Societe de Geographie 4집 9권에 수록된 것이다. 1846년 김대건신부가 원도면을 그려서 Montingny에게 전한 것을 Malte-Brun이 축소 정리하여 발표한 지도이다. 지도는 울릉도를 'Oulangto'(울릉도)로 표기했고, 그 동쪽에 독도를 'Ousan'(우산)으로 표시했다. '우산'이라는 우리 고유의 독도 명칭 부여 사실이 중요하다. 1996년 8월 『1855년 출판된 조선지도, Map of Korea Pulbished in 1855』 영인본이 한정판으로 발행되기도 했다. 현재 지도는 국회도서관 독도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김대건신부의 조선도(1855년) - COREE d'Apres l'Original dressee par Andre Kim en 1846 (국가기록원 - 독도, 국가기록원)
#세계지리 개설서 번역, 세계전도 완성
여기서 잠깐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배우 이경영이 맡은 좌포도대장 이응식은 서양 학문을 익힌 김대건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나라에 큰 힘이 될 뛰어난 인재임을 깨달아 예우를 갖추고, 헌종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힌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약해진 왕권으로 고뇌하는 헌종은 조선의 지도를 서양 언문으로 번역한 김대건의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에 안타까워한다.
지난해 11월 말 개봉한 영화 ‘탄생’은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1821~1846, 세례명: 안드레아)의 목숨을 건 개혁, 즉 의(義)를 향한 탐험적 발자취를 조명한 영화로, 김대건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에 16년 앞서, 서울(Seoul)을 포함하는 조선의 지명이 처음으로 영문자로 기록된 지도인 조선전도(1845)를 제작하는 등의 근대화 활동을 한 선구자로 그렸다. 만일 그때 조선이 당시 세도정치에 굴복하지 않고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 5개 언어를 구사할 뿐 아니라 지리학, 조선학, 측량학 등 다양한 학문을 습득한 김대건을 살려 개혁, 개방의 길로 나갔다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근대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이 기 영(초록교육연대 공동대표, 호서대학교 명예교수)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209280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6월 5일에 체포되어 그래 9월 15일에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 또한 이례적이란다. 국사범으로 체포 후 100일간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이의 마지막 생 3개월에 사제가 되기 위해 떠나서, 사제로 돌아와, 사제로 산, 3,574일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조선의 최초 신지식인인 그이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이에게 배교를 권하고, 그이를 관리로 등용할 것을 회유책으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말 버전의 세계지리 개설서 번역, 세계전도 완성 등의 업적을 남기고 순교를 택했다.
김대건 신부님은 우포도청(현 광화문우체국)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 졌으나 헌종의 배려로 효수형은 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이의 순교를 안타까워한 임금과 대신들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기자는 영화 <탄생>을 보고 나오면서 이웃과 얘기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예우를 받고 고신은 받지 않고 순교하셨으니…….”
탄탄한 고증으로 만들어진 영화라 들었기에 영화에서처럼 조선 최초의 사제로 그 능력과 올곧음에 준하는 예우가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참수도 단칼에 베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대건신부님은 40차례의 고문과 12명의 망나니에 둘러싸여 여덟 번의 칼질을 당했다고 한다.
“순교는 죽느냐 사느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김대건신부님길’을 걷고도 순교를 정의할 수 없어 고심하다 김대건 신부님의 방계 자손이라는 김**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며 비로소 순교의 참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수많은 조선의 민중이 순교를 택할 수 있었던 이유다. 빈부귀천이 없는 만민평등 세상을 열기 위한 그들의 선택이다.
이후 조선은 결국 일본, 미국 등의 외압에 나라를 개방하고 1886에는 프랑스와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된다.
익산에는 ‘김대건신부님길’이 있다.
걸어 본 길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그 길을 알고 걷는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글, 사진 = 권미숙 기자
익산이 더 궁금하다면 Click↘↙
#익산여행 #익산명소 #익산가볼만한곳 #익산성지 #익산나바위성당 #김대건신부 #익산김대건신부길 #김대건 #탄생 #영화탄생 #2023익산방문의해
- #조선순교자
- #조선전도
- #세계지리
- #익산여행
- #익산명소
- #익산가볼만한곳
- #익산성지
- #익산나바위성당
- #김대건신부
- #익산김대건신부길
- #김대건
- #탄생
- #영화탄생
- #2023익산방문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