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전래된 불교는 기존 특별한 신앙이 없던 우리 민족에게 빠른 속도로 퍼졌었습니다.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를 지나며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됩니다. 개인의 안녕은 물론이요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였습니다. 그중에는 외적의 침략을 불도의 힘으로 막기 위해 창건된 호국사찰도 있었습니다. 유교 정책으로 불교의 세력이 약해졌던 조선시대 불교는 호국사찰로 그 명맥이 유지되었었습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화성 남양읍 비봉산에 위치한 호국사찰을 찾았습니다.

멀리 서해를 바라보며 서 있는 봉림사로 신라 진덕여왕 때 고구려 백제와의 잦은 침략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물리치고자 창건되었습니다. 1300여 년이 지난 2023년 당시의 사찰은 아직도 건재합니다. 하지만 찾아가는 길은 평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이정표도 보이지 않던 공장지대를 통과하여 무봉산 초입에 도착합니다.

마을 끝자락으로 완만한 언덕지대를 따라 비봉산 봉림사가 새겨진 일주문, 사천왕상이 서 있는 천왕문이 나타나면서 사찰이 시작됩니다. 험상궂은 모습의 사천왕이 악귀의 사찰 출입을 막아섭니다. 1300여 년 전 당시 궁궐에서 기르던 봉황새가 절 주위의 숲에 와서 앉았으므로 봉림사라 칭하였고 산 이름도 무봉산이라 바꿨다 전해집니다.

사찰은 무봉산 기슭에 석축을 쌓아 다진 담장 사이로 범종각이 있고 너른 마당을 따라 극락전, 설법전의 전각이 있습니다. 석축 아래로는 종무소 역할을 하는 요사채가 자리 잡았습니다. 아주 소박한 규모입니다.

사찰 앞마당에서는 범종각 누각의 멋스러운 모습이 아름답고 주불전인 극락전이 마주합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한다는 아미타불이 모셔졌습니다. 호국사찰의 특성상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영혼들을 극락세계로 안내하는 의미를 담은 듯합니다.

봉림사를 찾을 때면 주의 깊게 둘러봐야 하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극락전의 아미타불 목조아미타여래좌상입니다. 복장 유물 가운데 고려 공민왕 11년인 1362년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어 고려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됩니다. 얼굴은 엄숙하며 몸은 앞으로 약간 숙여져 있습니다. 1978년 다시 금칠을 하는 과정에서 사리, 사리병, 섬유류, 곡물류, 구슬 등의 복장 유물과 경전 및 개금기가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신라시대 창건된 사찰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광해군 13년 1621년에 중수되었고, 1708년, 1884년에 중건되어 지금에 이릅니다. 근래에 들어선듯한 설법전과 3층 석탑이 앞마당에 자리 잡았고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약수가 작은 연못을 이루었습니다. 사찰 가장 위쪽으로 삼성각이 있습니다.

삼성각을 오르는 길은 자연 암반 계단으로 시작되네요. 그 옆으로는 오래전 돌을 쌓은 형태의 석축도 보입니다. 1300여 년의 시간을 짐작하게 되는 흔적들이었습니다. 일주문으로 시작된 오래된 사찰은 언덕 위 삼성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호국사찰 봉림사는 호국보훈의 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특별한 여정이었습니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아서는 풍경소리도 더욱 크게 들려옵니다. 무봉산 등산로도 안내되었으니 등산과 연계하여 초록 숲이 우거진 고즈넉한 산사를 만나보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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