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기 SNS 기자단 조윤희

서산서원

-주소: 경남 함안군 사군로 1235

(지번. 군북면 원북리 537-2)

-TEL. 055-580-2551(함안군청 문화유산담당관)

-연중무휴, 상시 개방

폭염, 열대야, 폭우 등 유난히 2025년의 여름이 뜨겁게 진행되어 우리의 일상이 어렵게 하고 있지만 자연의 시간은 자신들의 공간 안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위로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곳을 알게 된 이후 매년 여름날의 배롱을 보러 오면서 연꽃도 보자 싶어 왔었던 서산서원으로 출발할 때는 흐리기만 했었는데 막상 도착하니 비가 많이 내리더라고요.

배롱도 배롱이지만 서원 앞 연밭도 놓치기 싫었는데 늦게 방문하다 보니 올해도 연꽃은 볼 수 없었지만 우산처럼 내리는 비를 맞아대는 연잎들이 춤추는 모습이 싱그러워 담아보았네요.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소속의 법정리이며, 서산서원이 있는 원북리의 원(院)은 과거 진양 방면의 역원을 뜻하며, 북(北)은 북쪽 위치를 가리켜 ‘역원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포석이 깔린 바닥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얼마나 위력적이던지 비속으로 강당 쪽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워 비가 좀 덜 오기를 기다렸네요.

함안 서산서원은 숙종 32년 계미년(1706) 지방 유림의 공의로 생육신인 조려(趙旅)·원호(元昊)·김시습(金時習)·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랍니다.

1703년 창건되었고, 1712년(숙종 39)에 ‘서산(西山)’이라는 현판이 내려지면서 사액 서원(賜額書院)이 되었는데 사액서원(賜額書院)이란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扁額)을 내린 서원(書院)을 의미하지요.

사액서원에는 흔히 서적, 토지, 노비 등도 동시에 하사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서원'이라 사액(賜額)한 것이 시초였답니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강학 공간이 제례 공간의 앞에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고 있는데, 서산서원 역시 강학공간의 강당인 숭의당과 숙소인 양정당, 상의재가 제례공간 앞에 자리하고 있답니다.

서산서원의 강학공간인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 구조로서, 현판이 걸린 방문을 열면 강당인 숭의당이 나온답니다.

동재인 양정당은 헌관의 숙소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구조를 하고 있지요.

동재와 같은 구조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서재인 상의재는 유생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답니다.

동재와 서재 앞에 키 작은 배롱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는데, 이 어린 나무들이 자리를 지키면서 거목이 될 때는 함안의 내일이 어떤 흐름에 올라타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바라보게 되더군요.


강학공간을 돌아서 뒤로 돌아가면 사당이 있고 사당의 출입문을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3칸 크기의 팔작지붕 구조인 충의사가 있으며, 사당 안에는 생육신의 위패가 모셔져 있답니다.

충의사 왼쪽에 있는 소청각은 함안 조씨 관련 서적과 자료를 보관하고 있으며,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구조랍니다.

소청각 맞은편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1칸 크기의 맞배지붕의 구조랍니다.

충의사에 위패가 모셔진 생육신에 대해 알아볼까요?

생육신은 단종을 추모하며 절개를 지킨 6명의 신하를 말하는데 이들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거나 혹은 방랑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생육신에 대하여...

조려는 단종이 살아있을 때 원호와 함께 영월을 찾아 단종의 문후를 드렸으며 단종이 죽자 3년간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치렀고 세조가 즉위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산 아래에 살면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내며 스스로 어계(漁溪)라고 했고, 후세 사람들은 조려가 은둔한 서산을 백이산(伯夷山)이라고 불렀답니다.

김시습은 처형된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하고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지방을 떠돌며 유람 생활로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지요.

이맹전은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귀머거리, 소경이라 핑계하고는 친한 친구마저 사절하고 30여 년이나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은둔하였다고 해요.

원호는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로 쫓겨가자 영월로 가서 단종에게 문후를 드렸고, 단종이 죽은 후 세조가 호조참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로 귀향하여 은거하였다지요.

남효온은 단종, 세조 때에는 어린아이로 단종이 사망할 때는 4살 때였답니다. 그런 남효온이 생육신에 포함된 것은 「조의제문」을 지은 김종직이 그의 스승이고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김종직의 글을 사서에 넣었던 김일손이 그의 사형제이며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기소설 육신전(六臣傳)을 저술하는 행적 때문으로 그런 남효은은 방랑 생활하다가 사망하여 생육신으로 평가받는답니다.

성담수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성희가 아버지이며 성삼문은 6촌 형으로 사육신 처형 후 세조는 그에게 참봉의 관직을 내렸지만 받지 않고 은거하였다고 알려져 있네요.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 되었다가 그 후 조려 선생의 후손들이 1984년에 사우(祠宇), 강당(講堂), 재료(齋寮), 문(門), 원장(垣墻) 등을 빠짐없이 갖추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서산서원과 함께 자리한 배롱나무가 여느 배롱나무 출사지에 뒤지지 않는 모습이랍니다.

함안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1981~1984년에 조려 선생의 후손과 유림, 정부의 지원으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서산서원을 꼭 들러보시라 권해드립니다. 생육신 어계 조려를 배향한 사액서원으로, 채미정과 인접해 있으며 유교 유적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함안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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