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곡성의 뿌리를 찾아, 장절공 신숭겸 장군이 배향된 덕양서원
1,266년 동안 곡성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곡성에서는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다수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 살기 좋은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한시대를 거쳐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욕내군'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에는 처음 등장합니다. 서기 757년 신라 경덕왕 때부터 오늘날까지 무려 1,266년 긴 세월 동안 곡성(谷城)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신라시대 때 곡성군은 부유현(현재 순천), 동복현(현재 화순), 구례현( 현재 구례)을 속현으로 거느린 전라도 동부 중심지였습니다.
1389년( 고려 공양왕), 왜구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회복 불능의 피해를 입은 것을 계기로 당동성(현재 죽곡면 당동리)에 있던 행정 중심지를 현재 곡성읍으로 옮겨왔습니다. 1592년 정유재란 때는 1만 5천에 이르는 일본군에 의해 짓밟히면서 몇 년간 행정구역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외침으로 인한 수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곡성은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우리나라 발전에 기여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독창성 넘치는 곡성 문화를 계승해오고 있습니다.
곡성 역사의 튼튼한 뿌리를 상징하는 덕양서원
1960년대만 하더라도 곡성에는 영화관이 둘이나 있었고 인구는 10만 명에 육박하였습니다. 오늘날 곡성 인구는 이미 3만의 벽이 무너진 상태고 감소 추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역사에서는 왜구의 침입과 일본의 침략이 곡성의 소멸될 위기로 작용했다면, 지금의 소멸 위기는 우리나라를 강타한 인구 절벽으로 인한 원인 때문입니다. 참혹했던 시절 선조들이 꿋꿋하게 곡성을 지켜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틀림없이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곡성을 비롯한 유서 깊은 우리나라 지역들은 마을 앞을 지키는 거대한 당산나무 같은 존재입니다. 오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당면한 지역소멸 현상 또한 그 거목이 무수히 마딱뜨렸던 폭풍우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비바람에 우수수 쏟아지는 이파리만 보고 지나치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땅을 지탱해 역사의 뿌리를 새롭게 인식하고 자긍심부터 키우는 것이 위기 극복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튼튼한 곡성 뿌리를 상징하는 천덕산 기슭 덕양서원을 소개합니다.
덕양서원은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을 배향하기 위해 1589년(선조 22)에 세워진 서원입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으니 딱 3년 전이었네요. 당시 신숭겸 장군의 후손 신옥 곡성 현감과 이광 전라도 관찰사가 유림의 뜻을 모아서 곡성에 최초로 세운 서원입니다.
곡성의 수호신 장절공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덕양서원
신숭겸 장군은 통일신라 말기 서기 887년에 곡성군 목사동면 용사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후삼국 격변의 시대 때 태봉의 왕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개국공신입니다. 서기 927년 후백제군과 맞붙은 공산성 전투에서 위기에 몰린 왕건을 살리고 자신을 희생시켜 고려 시대는 물론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충신의 표상으로 삼았습니다. 성황신으로 숭배할 정도로 신숭겸 장군은 곡성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받들어온 자랑스러운 위인입니다. 서원문화는 유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것을 목표로 하는데 덕양서원에는 유독 무인 신숭겸 장군을 모시고 있는 이유입니다.
덕양서원은 세워진 지 10년이 지난 1597년 정유재란 때 곡성 땅을 짓밟고 지나간 1만 명의 일본군한테 철저하게 유린되었습니다. 저들이 유독 군사시설이 아닌 서원과 향교 그리고 사찰 파괴에 더 열을 올렸던 것은 문화적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저들에게 얼마나 심하게 짓밟혔으면 전쟁이 끝나 3년간은 행정구역으로서 기능이 아예 마비되었다고 역사는 전해줍니다. 1603년 곡성현의 기능이 다시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파괴된 덕양서원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1695년(숙종 25년) '덕양'이라는 사액을 받아, 국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사액서원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산의 남쪽이라는 의미를 지닌 서원의 정문인 산양문(山陽門)으로 들어서면, 덕양서원 현판이 붙어 있는 대강당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5칸 규모에 팔작지붕의 대강당은 소박하면서도 위엄이 있습니다.
교육기관으로서 역할과 기리는 인물을 배향한 사당으로서 역할이 서원의 주된 기능입니다. 따라서 강의실 역할을 하는 대강당과 장절공 신숭겸 장군을 배향한 사당인 덕양사는 덕양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지요.
동쪽에는 신덕제와 서쪽 연서제 두 건물이 서로 마주 보며 서 있습니다. 유생들이 생활하면서 공부하는 기숙사로 쓰인 건물들입니다.
연서제 옆에 있는 전사청은 덕양사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각종 제구를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은 야심 차게 추진한 개혁과제로 서원 철폐령을 단행합니다. 일부 서원들이 원래 설립 취지에서 벗어나 사대부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역할에 치중하다 보니 백성들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무작정 서원을 철폐한 흥선 대원군의 무리한 조치는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켰지요.
서원 철폐와 서원 훼철이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당시 서원이라는 물리적 흔적 자체까지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덕양서원도 그 대상이 되어, 한동안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가혹한 서원 철폐를 단행한지 10년이 지난 1881년, 신숭겸 장군의 후손이면서 전라 병마사였던 신헌이 글을 짓고 형조판서 신정희가 글씨를 써 훼철된 덕양서원의 터에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기적비와 비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더 흐른 1934년에 이르러 신숭겸 장군 후손인 평산신씨 문중과 곡성 유림들이 뜻을 모아 오늘날의 모습의 덕양서원을 복원하였습니다.
덕양서원에서는 지금도 매년 곡성 유림과 후손이 참석하여 장절공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제례를 열고 있습니다.
'인을 완성시킨다'라는 의미를 지닌 성인문을 통과하면 장절공 신숭겸 장군을 배향한 사당 덕산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신숭겸 장군의 혼이 서린 덕산사는 아주 옹골차고 당당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신숭겸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내부는 제례 때만 공개합니다.
곡성의 역사가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왔듯 미래에도 계속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하는 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모두가 그 소명에 충실할 때 심각한 지역소멸 위기에 대한 해법도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맑은 햇살이 기왓장에 부서져 내리는 가을날 덕양서원을 거닐면서 역사의 향기를 음미해 보세요.
■ 덕양서원 여행팁
▷ 주차요금. 입장료 : 무료
▷ 대중교통이용 :오곡면 소재지에서 도보 또는 택시 이용
▷ 개방시간 : 1000~1800까지
▷ 주의사항 : 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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