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중항쟁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 생가 방문기

소셜지기단 심인섭

5.18민중항쟁 43주년을 앞두고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1950~1980) 생가를 찾았습니다

광산구 천동길 46 (신룡동 570-1번지)로 검색하면 되는데요, 대중교통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임곡 89번, 임곡 91번, 임곡 290번을 타고 천동 마을에서 내리면 되는데요,

운행간격이 가장 빠른 것은 임곡 89번으로 40분에서 110분 사이이니 충분히 보고 나올 수 있겠습니다

마을 입구부터 윤상원 열사 생가까지 쉽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피리 부는 윤상원 열사 조형물도 있는데요, 피리는 세로로 부는 악기이기에 아마도 소금 또는 대금으로 보이지만, 입으로 부는 관악기는 모두 피리라고 생각하기에 피리라고 부른 듯하네요.​

마을 안쪽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1480년 마을이 형성되면서 조성한 것으로 맥반석에서 용출돼 수질이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샘골(泉洞)입니다.

​윤상원 열사 생가는 양방향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요, 차량을 가지고 가면 안 돼요~~

우물 쪽으로 가면 100m 정도 걸려요. 반대로 돌아가면 200m 정도 되니 한 바퀴 빙 돌면서 윤상원 열사가 거닐었을 골목도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문은 항상 열려 있어요.

문패의 이름 윤석동 씨는 윤상원 열사의 부친으로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장을 지냈는데요, 2019년 6월 16일 그립고 그립던 아들 곁으로 소천하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문패에 이름이 있어 눈시울이 살짝 붉어집니다.​

윤상원 열사 생가는 크게 세 건물로 되었는데요, 한가운데 함석지붕이 윤상원 박기순 열사 자료 전시관이네요.

윤상원 열사 생가는 2004년 12월 11일 발생한 화재로 뼈대만 남고 거의 소실되었는데요, 국가보훈처의 지원 대상이 안돼 복원에 어려움을 겪다 전남대 총동창회의 모금운동으로 여러 사회단체가 참여했고 대한 주택 건설협회 광주전남도 지회의 지원으로 2005년 5월 복원했습니다.

윤상원 열사 생가는 현재 윤상원 박기순 열사 자료 전시관으로 운영하고 있는데요, 두 분은 영혼결혼식을 올렸죠.

박기순 열사(1957~1978)는 보성 출생으로 광주로 유학해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국사교육과에 진학해 사회과학 서클 '루사'를 통해 활발한 사회운동을 했답니다.​

1978년 전남대 교수 11명의 '우리의 교육지표'로 박정희 정권의 '국민교육헌장'에 맞서자 교수 전원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고 이에 학생들은 농성과 시위에 나섰는데요, 10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때 박기순 열사는 시위 주동자로 전남대에서 제적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광천동에 있는 아시아 자동차 하청업체에 위장취업해 근로자들을 위한 들불야학을 광천동 성당 교리 학습실에 창시했는데요, 같은 시기 윤상원 열사도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와 광천동 공장에 취업한 상태라 박기순 열사의 요청으로 강학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박기순 열사가 불의의 연탄가스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윤상원 열사도 5.18 최후 항쟁으로 생을 마감하다 보니 양가의 노력으로 1982년 망월동 묘역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윤상원 박기순 열사 자료 전시관은 해파제입니다.

윤상원 열사의 호가 해파(海波)입니다.

문이 닫혀 있다고 놀라지 마시고 옆으로 밀어보세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란 팻말이 있는데요, 그냥 문은 열립니다.

​​방문도 닫혀있고 불도 꺼져있지만, 자료 전시관에 들어가면 불을 켜고 보세요.

그리고 나올 때는 아닌 온 듯 불도 끄고 문도 닫고 마루 샤시문도 닫고 나오면 됩니다.​

윤상원 박기순 자료 전시관에서는 두 분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전시되었습니다.

박기순 열사는 앞서 잠깐 소개했는데요, 윤상원 열사는 이제는 모르시는 분이 없을 듯!​

윤상원 열사는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며 연극반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연극을 하면서 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깊었다는데요, 학생운동을 주도한 경험으로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려고 했지만, 주택은행에 입사해 서울서 직장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신독재 암울한 시절 은행에 앉아 돈만 세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해 6개월 만에 퇴직하고 광주로 내려와 광천 공단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윤상원 열사는 광천동에서 박기순 열사의 권유로 들불야학을 함께 하게 되었는데요, 1979년 10.26 직후 전국 민주노동자 연맹 준비 위원회에 참여해 활동하다 1980년 5월 계엄군의 만행과 언론통제로 광주 5.18의 진실이 막히자 들불야학 강학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만들어 광주의 실상을 널리 알렸습니다.

자료 전시실이지만, 평소 읽었던 책과 일기장 등이 있는데요, 2004년 화재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아쉬움도 있겠습니다.​

투사회보 제5호를 보니 '광주 지도자급 인사 시국 수습차 계엄사령부 방문'이란 타이틀이 보입니다.

5월 23일 오후 1시 도청 앞 광장에서 '민주쟁취 시민 궐기대회'도 예고하고 있는데요, '중고등학생 무기 소지 엄금'이라는 제목도 보입니다.

발행일이 5월 23일이니 새벽에 광주 곳곳에 뿌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광주의 유일한 언론이 바로 투사회보였다는 것!!

윤상원 열사는 옛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에 앞서 계엄군의 최후통첩에 시민군이 투항과 저항으로 양분되자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라고 설득했다는데요, 결국 남은 시민군과 함께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작전에 끝까지 투쟁하다 사망했습니다.​

시민군 대변인 시절 시민대표 완장과 들불야학 교재, 1980년 7월 20일 자 전남 합동수사단 조서 용지 등이 전시되었습니다.​

윤상원 열사의 고뇌에 찬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당시 어지러웠던 세상은 물론 민주화를 쟁취한 이후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의 삶을 관조하는 철학이 되었는데요, 5.18민중항쟁 43주년을 맞아 광주 곳곳에 있는 사적지도 돌아보고 마지막은 꼭 임곡동 윤상원 열사의 생가도 방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 광산구 소셜지기단의 기획·취재 기사로 작성되었습니다


📷2023 광산구 소셜지기단 심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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