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원은 존경하는 인물을 모시는 사당과,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 등의 기능을 했습니다. 비슷한 역할을 했던 향교를 국가가 세우고 운영했다면 서원은, 지역 또는 가문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이 다릅니다. 따라서 향교가 공립학교라면 서원은 사립학교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소수서원은 고려 때 설립되었지만, 대부분 서원들은 조선 중기 이후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서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나라 때부터 설립된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 서원이 주로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면, 우리나라 서원은 사대부의 계급 강화와 결속력을 높이는 것을 실질적인 설립 목적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신숭겸 장군을 모신 덕양서원 외삼문

민간 주도로 설립된 서원이라도, 국가(왕)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공식적인 권위를 갖게 됩니다. 그것을 사액서원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사학재단과 유사합니다. 사액서원이 보유한 토지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노비에 대해서도 군역을 면제해 주는 특혜를 베풀었습니다. 이 부분이 악용되면서 결국은 서원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숙종 무렵에는 전국에 700개에 가까운 서원이 설립되었습니다. 서원의 난립은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 운영되었던 초기 서원들의 순수성이 퇴색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특정 가문이 사유재산처럼 소유하면서 성현 대신 그들의 조상을 모시는 사당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고, 부유한 가문에서는 서원을 여러 개 세워서 탈세와 군역 면제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는 등의 폐해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서원을 통해서 사대부들이 권력을 사적으로 휘두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사액서원이었던 덕양서원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시대에도 요즘처럼 입시 열풍이 극심했다는 것입니다. 서원이 바로 조선시대 입시열풍의 온상이었습니다.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한 명문 서원이 수 록, 입학 경쟁률이 대단히 높았다고 합니다. 당연히 시험을 통과해야 입학이 허용되었겠지만, 일부 부유층은 실력이 달리는 자제를 명문 서원에 입학시키기 위해 막대한 기부금을 내거나, 건물을 지어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서원이 생기면서, 조세와 병역 관리에 있어 문제가 잇따라 터졌습니다. 그래서 숙종 이후 역대 왕들은 서원을 어떤 방식으로 정리해야 할지에 대해 골머리를 앓았지만 뚜렷한 해결책은 찾지 못했습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이고 사대부를 대표하는 것이 왕의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대부의 권위를 상징하는 서원을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일지라도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고종의 등극과 함께 권력을 거머쥔 흥선 대원군이 그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래서 사액서원 40개만 남기고 600개가 넘는 서원을 한꺼번에 철폐해버렸습니다. 지역의 신망이 높고, 대표성을 갖는 서원까지 문을 닫게 만드는 바람에 엄청난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역사는 그 일을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 또는 서원철폐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덕양서원의 기숙사 역할을 했던 연서재와 신덕재

서원 철폐 사건 이후에 지역에서 신망을 받아왔던 서원이 하나둘씩 복원되었지만,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곡성을 대표하는 덕양서원도 그중 하나입니다. 여러 연구를 통해서 서원의 순기능과 우리나라 서원이 갖는 특별한 역할이 주목을 받으면서 2019년에는 9개의 서원이 한꺼번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신숭겸 장군 비를 모신 비각

덕양서원은 1589년(선조 22)에 설립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왕건을 살린 충신의 표상이면서, 민간에서 성황신으로 모시는 곡성 출신 신숭겸 장군을 배향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1,5000 명의 왜군이 곡성을 휩쓸고 지나가는 과정에서 곡성의 문화유산을 모조리 파괴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곡성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곡성현이 조선의 행정구역에서 사라져버렸을 정도입니다. 1603년 곡성현 기능이 되살아 나면서 곡성 사람들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곡성 향교와 덕양서원을 다시 짓는 일이었습니다. 덕양서원을 곡성 정신 그 자체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숭겸 장군 비각

1665년에 이르러 강당과 전각 등의 건물이 들어서면서 서원으로서 완벽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695년, 숙종 임금으로부터 덕양(德陽)이라는 명칭을 하사받아, 어엿한 사액서원으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이어 곡성 인재 양성의 일익을 담당하는 한편, 신숭겸 장군께서 펼친 덕행을 후손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비각과 비석

덕양서원도 흥선 대원군이 밀어붙인 서원철폐령의 직격탄을 맞고 1868년(고종 5) 훼철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곡성의 정신 유산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던 곡성 유림을 비롯한 지사들의 뜻이 결실을 이루어 1934년 덕양서원이 역할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덕양사

덕양서원에는 신숭겸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사당인 덕양사, 이곳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연서재(燕序齋)와 신덕재(愼德齋), 정문인 산양문, 사당으로 들어가는 성인문, 유생들이 공부를 하고 강론을 벌였던 강당, 신숭겸 장군의 행적을 적어놓은 비석을 모신 비각, 그리고 여러 채의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덕양사에는 신숭겸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매년 제례를 올립니다.

오늘날 덕양서원에서는 더 이상 유학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곳에 배향된 신숭겸 장군에 대한 숭모와 제례에 대해서는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신숭겸 장군이 후손에게 남긴 덕행이 미래세대에게도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덕양서원이 자리 잡은 공간과 건물의 보존은 물론 그곳에 깃든 정신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 덕양서원을 여행하려면

▷ 탐방 : 가능

▷ 주소 :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덕양서원길 42번지

▷ 주차장 : 이용 가능,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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