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전
프리다 칼로 레플리카전 "Viva Frida Kahlo"
Viva Frida Kahlo
멕시코 미술의 국보급 화가, 프리다 칼로 展
연산문화창고에서 진행되는 전시회는 늘 방문하여 관람하는 편입니다. 다양한 시대, 작가들의 삶의 모습을 작품을 통해 만나볼 수 있는 멋진 기획전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전시회와 연계된 다양한 체험활동 구성까지 늘 만족스러웠던 경험 때문입니다.
이번 전시는'두 명의 프리다'라는 작품을 통해 알게 되었고 작품들이 매우 강렬하고 인상 깊었던 프리다 칼로라는 화가의 전시회였습니다.
프리다 칼로 展
전시기간 : 2025. 03. 21(금) ~ 05. 11(일)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시간 : 10:00 ~ 18:00 (입장마감 17:30)
전시장소 : 연산문화창고 4동 다목적홀 (충남 논산시 연산면 선비로 231번길 28)
관람/체험 : 무료/일부무료
문의 : 041-730-2960
프리다 칼로의 전시회는 그녀의 연대표와 성장 배경, 결혼생활, 작품의 특징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됩니다.
1907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난 그녀는 195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47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그녀가 남긴 초현실적인 자화상과 강렬한 색채의 작품들은 개인적인 고통과 멕시코 문화, 정체성을 표현하며 세계적인 예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렸을 적 소아마비를 앓았고, 18세 때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던 프리다는 해당 사고로 인해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고,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멕시코의 유명 화가이자 정치적 인물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하며 예술적 활동을 넓혀갔습니다.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으로 행복했기도 했지만, 남편과 여동생과의 불륜을 알게 되며 절망했던 순간에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던 프리다..
이번 전시회는 총 4개의 섹션으로 나눠져 그녀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SECTION 1. 1907-1932 (초기)
초기 그림에서 그녀가 선택한 색채는 대체로 어두운 톤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화가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작품으로 자화상을 가장 먼저 완성했습니다. 프리다 칼로 자신이 겪게 되는 새로운 경험들, 여성으로서의 아이를 잃은 어머니, 어머니를 잃은 아이를 통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면서 프리다 칼로는 예술가로서의 독창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렇듯 프리다 칼로의 초기 회화 작품에서는 서구 유럽 미술의 영향으로 인한 작품 성향에서 벗어나 보다 멕시코적인 소재를 근간으로 한 개인사적 경험에 뿌리를 둔 작품으로의 전환이 꾀해지는 특성을 보입니다. 색채의 사용에 있어서도 초기작의 낮은 명도의 어두운 톤으로부터 멕시코 전통문양에서 발견되는 밝은 명도의 색채가 다양하게 구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926년 작품 <사고>입니다.
프리다는 사고 당시 충격이 컸던지 사고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위 작품은 이후 교통사고의 순간을 종이에 연필로 그려 기록해 둔 것이며, 당시의 사고를 "참, 이상한 사고였다. 격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요한 가운데 천천히 모두를 해친 듯했다."라고 회상했다고 합니다.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이라는 작품입니다.
프리다 칼로는 1년 가까이 척추를 고정하는 코르셋을 입고 지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어 어머니가 침대에 부착하는 특수 이젤을 만들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침대 위에 거울을 달아 놓고 자신의 모습을 심도 있게 관찰하여 그린 첫 작품입니다.
SECTION 2. 1933-1949 (중기)
이 시기의 대표적인 미술 형태는 나름대로 혁명적인 미술을 표방한 초현실주의입니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이르기까지의 시기는 고도의 역량을 발휘하여 가장 많은 역작을 남긴 시기이며, 화가로서 인정받은 시기입니다. 1937년과 1938년 사이 그녀는 결혼 후 8년 동안 그렸던 것보다 더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기법적인 면뿐만 아니라 보다 능숙한 표현 방법으로 작품 활동에 전념한 때입니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까지의 상당수의 자화상에서는 작품에 애완동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심리적인 위안으로 동물을 개입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1940년 대는 해외에서 갖은 개인전의 성공과 멕시코에서의 '국제 초현실주의 전'으로 명성을 날림으로서 화가로서의 인지도 확고해지는 시기였으며, 많은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했습니다.
1939년 멕시코로 돌아온 프리다 칼로는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 머물며 디에고 리베라와의 이혼 절차를 밟습니다. 1940년에 완성된 <두 명의 프리다>는 당시 프리다 칼로의 심리적 상태를 가늠하게 하는 단서로 작용하며, 그녀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유일하게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100cm가 넘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두 명의 프리다>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심장이 몸밖으로 나와있는 점도, 두 개의 심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점도 그리고 가위로 핏줄을 잘라 피를 흘리고 있는 모든 부분이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작가는 남편 디에고와의 이혼을 진행하며, 디에고가 사랑했던 프리다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은 프리다를 표현했다고 밝혔는데 결과적으로는 심장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 죽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혼 당시의 프리다의 심정이 작품을 통해 느껴졌습니다.
전시회의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색감이 전반적으로 원색으로 표현되어서인지 프리다의 작품들과 잘 어울렸고, 전시장의 음악 역시 작품과 잘 어울려 감상하는데 몰입감을 주었습니다.
SECTION 3. 1950-1954 (말기)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프리다의 병세는 악화되었습니다. 피부가 썩어들어가는 괴저병으로 인해 오른쪽 발가락을 자르게 되었고, 이 수술로 인해 몇 번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주치의 파릴박사에게 고마움의 뜻으로 2개의 작품을 선물하고, 1954년 작업을 재개할 때까지 1년 동안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1946년 공산당에 가입한 이래 공식적 형태의 시위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프리다는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디에고와 함께 과테말라 대통령 지지 시위에 참여했다가 폐렴에 걸려 10일 후, 1954년 7월 13일 생을 마감했습니다.
건강이 악화되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물을 많이 그렸는데, 이 시기의 정물화는 탐스럽게 익었으면서도 때론 으깨어져 묘사되어 있습니다. 과일의 생명력과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즐겼으며, 과일을 그리면서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다 칼로는 과일이 내포하는 인생의 무상함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삶이여, 만세(Viva La Vida)'라는 작품은 프리다가 47세 요절하기 직전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혹자는 프리다가 죽기 직전에 이미 이전에 그려둔 그림을 꺼내 제목과 연도를 덧붙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프리다의 최후 작품은 이 그림이 아닌 것이 됩니다. 다만 그 모든 불운과 아픔을 향해 보란 듯 날리는 당당한 메시지 '삶이여, 만세(Viva La Vida)'라는 해설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최후 작품으로 보는 해석보다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해석이 더 프리다 칼로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SECTION 4. 영혼의 일기
1944년 무렵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리다 칼로는 일기를 썼다고 합니다. 프리다의 작품 중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것은 그녀의 일기장으로, 그녀의 내밀한 열정과 사랑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솔직하게 써 내려간 일기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일기입니다. '떠나니? 아니.'라는 글과 함께 표현되어 있는 부러진 날개를 가진 자신의 모습.. 밑에서는 뜨거운 불꽃이 일고 있는데 프리다의 고통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고통을 이겨내고, 굴복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아니'라는 글을 남겼을 거라 생각하니 그녀의 삶에 대한 의지,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한편에는 프리다 칼로의 사진이 전시되어 이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모습, 드레스를 입은 모습, 작품 활동을 하는 모습 등이 담겨있는데 그중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있는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멕시코의 당시 사회상과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프리다의 작품은 전통문화의 배경이 되는 내용 즉 죽음, 낮과 밤, 해와 달, 남성과 여성처럼 우주의 모든 양상이 일련의 이중성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지배받는다는 콜럼버스 이전의 고대철학인 아즈텍의 우주관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의심할 나위 없는 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녀가 이 나라 미술계 내에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는 점을 들어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또한 멕시코 화폐 중 제일 고액권인 500페소 지폐의 한쪽 면에는 프리다 칼로, 한쪽 면에는 디에고 리베라가 있는데 근대 미술가 부부가 지폐의 앞뒷면에 등장하는 것은 멕시코가 유일하며, 그만큼 두 미술가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전시의 마지막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적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여 만세!'라는 마무리로 훌훌 털어내는 프리다 칼로展 전시 연계 체험 <희망의 문구 벽> 코너도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마음의 짐을 프리다 칼로처럼 작품 혹은 글을 통해 표출하는 방법에 저도 참여해 보았습니다. 힘들거나 속상했던 일들을 간단하게 적고, 그래도 이겨낼 수 있다는 스스로 다짐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프리다 칼로와 관련된 특징적인 내용들이 담긴 요약본(?)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프리다 칼로 하면 생각나는 일자 눈썹, 자화상, 수없이 진행한 수술 등 알고 있던 사실 외에도 사탕을 좋아했다는 점, 장난꾸러기였다는 점, 프리다의 패션 등과 관련한 정보도 흥미로웠습니다.
출구 쪽에는 오늘의 전시를 기념할 수 있는 멋진 포토존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전시회만 보고 가기 아쉬워서 오감놀이터6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시연계 체험도 진행했습니다.
프리다 칼로 화관 꾸미기와 프리다 칼로 자화상 컬러링 체험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가족들, 부부, 학생들 등 다양한 연령대와 구성원의 참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특히 저는 제가 직접 프리다 칼로 자화상을 색칠하는 것도 좋았지만, 체험하신 분들의 작품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다양한 색감과 자신만의 특색이 돋보이는 결과물들을 보니 절로 미소 지어졌습니다.
이번 프리다 칼로의 전시회는 수없는 좌절과 고통에도 삶에 대한 그녀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강렬한 색감과 함께 표현된 그녀만의 작품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남은 전시 기간 동안 꼭 방문하셔서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을 직접 보시고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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