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기념관'을 찾아가는 길은

반월당역 1번 출구로 나와

해바라기서점 방향으로 걸어오면 됩니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 사이로

이육사 기념관이 있어요.

책 모양의 조각이 있고요.

'펜의 힘'이라는 고흥식 작가의 조각이에요.

절정이라는 시가 씌어 있어요.

팸플릿도 있었어요.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작가,

이육사'라고 적혀 있네요.

이육사(1094~1944)의

생애도 기록되어 있어요.

이곳은 대구문학관에서 관리하고 있네요.

햇볕 좋은 날,

전시관 안으로 빛이 들어와 예쁘네요.

영상도 10분 나옵니다.

작은 의자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도슨트가 있어서 관람객에게 해설도 해주시고요.

지나가던 주민,

울산에서 오신 분들이 다녀가셨어요.

동네에 전시관이 생겨서 흥미로워하시더라고요.

왜 이곳에 전시관이 생겼느냐고도 물으셨어요.

이곳은 이육사 시인이 안동을 떠나

대구에 머물던 1920년부터

서울로 이사 가던 1939년까지

거의 20년 기간 중

1920년부터 10년간 사셨던 곳이에요.

옛집이 있던 이곳은 남산동 662-35번지로

2015년에 찍은 모습입니다.

이육사기념사업회와 대구 시민들이

이육사 생거 터 지키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서

이 전시관이 생겼네요.

< 이육사의 생애 >

이육사 시인은 4라는 숫자와 인연이 깊어요.

1904년에 음력 4월 4일에 태어나

1944년에 만 40세의 나이에 돌아가셨어요.

해방을 보지 못하고 가신 게 안타깝네요.

안동 생가 부근에 이육사문학관도 있어서

문학기행으로 많이 갑니다.

대구는 이육사 시인이 17세부터 36세까지

20년간 살던 곳입니다.

전시관에는 <청포도> <광야>라는

시가 적혀 있네요.

<청포도>라는 시는

요양차 들린 포항에서 쓴 시로,

해병대 부근이

옛날엔 포도밭이 많았던가 봅니다.

포항 일월동엔 청포도문학공원,

청림동엔 청포도문학거리가 있어요.

시인의 시 중 <절정>을 베껴봅니다.

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문장>(1940)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구요.

이활, 이육사 등 호가 많습니다.

수인번호 264를

자신의 필명으로 정한 이육사 시인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나고

투옥되어 무죄로 풀려날 때까지

1년 7개월이나 옥고를 치렀다고 해요.

그때 수인번호가 264입니다.

이육사 시인은

대구에 집을 두고도 국외로 활동범위가 넓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 떠난 유학이기도 하고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이육사 시인의 <육사시집> 초간본

이육사 시인이

1944년 베이징감옥에서 사망한 후,

1946년 동생 이원조 작가에 의해 출간됩니다.

동생 이원조 작가도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평론집을 낸 작가입니다.

6형제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가

고문으로 사망하기도 하고,

살아남은 형제들은 월북하게 됩니다.

이육사 시인과 그의 형제들

모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이육사 기념관에서

대구에서의 이육사 시인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개관 시간: 10:00~17:00

(13:00~14:00 휴게시간)

월요일 휴관


{"title":"이육사 시인이 살던 곳 대구 이육사 기념관","source":"https://blog.naver.com/daegu_news/223291390453","blogName":"대구광역시..","blogId":"daegu_news","domainIdOrBlogId":"daegu_news","logNo":223291390453,"smartEditorVersion":4,"lineDisplay":true,"outsideDisplay":true,"cafeDisplay":true,"blogDisplay":true,"meDisplay":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