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세계자연유산, 수원화성(제11기 제주시 SNS 시민기자단 도외팸투어 현내숙)
수원화성은
조선 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다.
정도는 장안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원(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이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 라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 적대를 세웠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형태이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 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년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 시대 성물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 전쟁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석축에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정조는 화성 축성이 완료될 무렵
성신사를 설치할 것을 명령하고 축문을 지어 내렸다.
1796년 9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신주를 봉안한 후,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올렸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 (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웠다.
유여택이란
『시경』에서 주나라의 기산을 가리켜 ‘
하늘이 산을 만들고 주시어 거처하세 하였다’ 라는
고사를 인용해서 지은 이름이다.
도는 유여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제11기 제주시 SNS 시민기자단
현내숙 기자님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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