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녹두장군 전봉준관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올린 시대의 영웅
녹두장군 전봉준관
“제폭구민(除暴救民) : 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한다. 보국안민(輔國安民) : 나라를 구하고 민중을 편안케 한다.” |
탐관오리의 학정과 나라를 빼앗으려는 외세에 맞서 봉기한 동학농민군들의 외침입니다. 동학농민운동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역사적 인물은 녹두장군 전봉준이지요.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반봉건, 반외세의 투쟁을 진두지휘했던 전봉준장군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녹두장군 전봉준관’ 이 있습니다.
이곳은 밀고한 옛 부하와 관군들에 의해 전봉준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부끄러운 우리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녹두장군 전봉준(1855.1.10.~1895.4.24)은 누구인가?
그는 몰락한 양반인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몸이 왜소하여 녹두(綠豆)라고 불렸고, 훗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35세 전후인 1890년 동학에 입교하였고, 고부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농민봉기의 불씨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비행에서 비롯되었다. 1893년 12월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들이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1894년 정월 10일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른바 고부민란이다.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가고,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리고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1894년 3월 하순 백산에 집결하고 봉기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4개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의 뜻을 밝혔으며, 각 처에 통문을 보내 농민들의 적극적 호응을 얻음으로써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1894년 4월 4일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부안을 점령하고 황토현에서 정부군을 대파했으며, 정읍, 고창, 무장에 이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주화약의 성립으로 폐정개혁안이 받아들여지고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폐정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빌미로 외세의 국권침탈 야욕이 거세지자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으나,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일본군과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은 정읍으로 피신하였다가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1895년 4월 24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발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전봉준기념관은 역사적 아픔의 현장이지만,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으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네요.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커다란 입석을 마주하게 되는데, 전봉준의 절명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겠느냐만, 나라 위한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겠는가?”
이어 이 곳이 전봉준이 체포된 곳임을 알리는 ‘전봉준장군피체유적비’가 세워져 있고, 전봉준의 발자취를 기억할 만한 자료들을 전시하는 작은 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 입구는 강렬한 눈빛의 전봉준장군이 지키고 있네요.
얼마전 바로 이 자리에서 전봉준 장군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에피소드를 전해주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은 적 있었는데요. 역사문화관광지는 허투루 관광하기보다 문화관광해설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참 유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광지 해설을 희망하는 개인 및 단체 관광객은 사전예약을 통해 무료해설 안내를 받을 수 있으니 신청해보세요.
(예약문의 : 순창군청 문화관광과 063-650-1648)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동지들과의 개혁 의지를 담은 사발통문, 폐정개혁안,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작성한 창의문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관 밖에는 농민군들과 함께 창의문을 낭독하는 결의에 찬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있어요. 이를 보노라면 나라와 민중을 사랑한 그의 정신이 아련히 전해집니다.
옆쪽에 위치한 초가집 두채는 전봉준장군이 붙잡힌 주막을 재현한 것으로, 당시 민간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옹기, 항아리, 망태, 키, 멍덕 등 농기구와 생활집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중앙 본관 건물에는 관리사무소와 농촌유학체험자의 장기투숙이 가능하도록 편의시설을 갖춘 생활관이 있고 부대시설로 운동장, 족구장 등이 있습니다.
취재차 방문했을 때 인근 쌍치초등학교로 유학 온 도시의 초등학생 가족이 머물고 있었는데요. 전시관 관리 담당자에 따르면 조만간 기념관 시설을 리모델링할 계획이라 하니 기대가 큽니다.
앞서 본 주막 뒤편에는 전봉준이 현상금에 눈이 먼 김경천과 관군들을 피해 월담하다 붙잡히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흙담이 있습니다. 붙잡힐 당시 몽둥이에 맞은 심한 부상으로 재판이 열릴 때 걷지도 못하고 가마에 실려 나왔다고 하니 참으로 분통한 생각이 듭니다.
시인 안도현은 체포되어 실려가는 전봉준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습니다.
-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중략)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의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민중들의 슬픔과 분노가 시로 승화되어 있어요.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 본심이다. 탐관오리들의 못된 짓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재판중에도 그는 흔들림없는 의연함을 보였다고 합니다. 130여년전 불의에 맞서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봉기한 전봉준, 비록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고 그는 처형되었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전봉준관을 관람하는 내내, 영웅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잡초같은 생명력으로 불리워졌던 노랫가락이 입속에 계속 맴도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
녹두장군 전봉준기념관
순창군 쌍치면 피노길 65-29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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