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의령 덕곡서원에서 만나는 퇴계 이황 선생과 서원 이야기
의령 덕곡서원에서 만나는 퇴계 이황 선생과 서원 이야기
의령군 블로그기자 조 윤 희
덕곡서원(德谷書院)
-소재지: 경남 의령군 벽화로 629-12
(지번. 의령읍 하리 621)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1호 (1985년 11월 7일 지정)
-문의 및 안내: 055-570-2531
-주차장/ 화장실 있음
의령 하면 자연스럽게 홍의장군 곽재우가 떠오르지만 퇴계 이황도 의령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랍니다.
오늘 제가 찾은 덕곡서원이 바로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 위패를 모신 서원이지요.
덕곡서원은 항시 문이 굳게 닫혀 있다고 하길래, 취재 목적으로 의령군에 연락을 했더니 담당자가 취재하는 날에 와서 열어준다고 하더군요.
취재 당일 좀 일찍 도착한 관계로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중 도착하셔서 문을 열어주셨는데, 사진을 다 찍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문을 잠그시더라고요. 연락이 닿아서 감사했고 또 시간을 내서 와주신 것에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출입문(외삼문)인 앙지문(仰止門)
출입문인 외삼문에 앙지문(仰止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높은 산을 우러러보듯이 선현들의 행실을 본받아야 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시경(詩經)'의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에서 따온 말이라는군요.
서원 안으로
앙지문(仰止門)을 열고 들어선 눈에 제일 먼저 보인 서원의 모습입니다.
지형을 고려해 지은 것인지 제법 높은 곳에 돌 기단을 세 단이나 받쳐 올린 위에 담장을 둘러 세운 것이 세속에 속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 증진하겠노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높은 곳에서 마치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어서 서원의 모습이 경의로웠습니다.
백화산 동쪽 자락에 덕실의 초입에 위치해 있고 길가에 큰 비석이 여러 기 서 있어 비(碑) 선골이란 말이 변음 되어서 비성골, 비신골 등으로 불러왔다는 성남마을에 덕곡서원이 있는데 대부분의 서원은 동재, 서재를 좌우로 하고 그 뒤에 강학 공간과 그 뒤에 사당을 세우는 전학후묘의 형식인데 반해 이곳은 서원과 사당이 나란히 배치된 모습이어서 특이하더군요.
강학 공간인 덕곡서당(德谷書當)
1985년 11월 7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31호로 지정받은 덕곡서원은 우리가 잘 아는 퇴계 이황 선생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의령과 이황 선생이 무슨 연결고리가 있나 했더니 퇴계 선생의 장인인 허찬 진사가 30여 년간 경북 영천시 초곡동(영주시 문정동)에서 우거하다가, 출생 고향인 가례촌으로 낙향하면서 이곳 처가댁을 방문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네요.
1656년(효종 7)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1660년(헌종 1) ‘德谷(덕곡)’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된 덕곡서원은 지역 유학 교육의 중추가 되었다. 이후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목조건물 전부가 철거되었으나, 1902년(고종 39년) 유림이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였는데, 특히 서당은 4칸으로 중건하였답니다.
원내의 여러 행사 및 유림의 회합과 학문의 토론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던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가운데 있는 우물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두 칸의 방이 있고 오른쪽에는 한 칸의 방이 있으며 온돌을 사용했는지 아궁이도 보이더라고요.
겨울이라 산이고 나무고 모두 헐벗은 모습이지만 풀이 돋고 잎이 나며 꽃이 피는 계절의 서원은 상당히 운치가 있을 곳으로 보이던데 이곳이 다른 지역과 달리 잠겨 있다는 것이 조금 안타깝더군요.
항시 볼 수 있고 찾을 수 있는 곳이 된다면 의령을 여행하는 방문자들에게 좋은 관광상품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말이지요.
강당 툇마루에서 내려다 본 외삼문 앙지문의 전형적인 솟을대문 모습이 제대로 보입니다. 옛날 대문 옆에는 문 지키는 하인이 사는 좁은 방 한 칸과 잡다한 물건을 넣어두는 창고가 문에 딸려 있음을 알 수 있고, 외삼문 옆에는 옛 모습을 취하고 있는 현대식의 화장실이 있답니다.
동재 직방재(東齋 直方齋)
1660년(헌종 1) 사액서원이 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 목조건물 전부가 철거되었다가 1902년(고종 39) 유림이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고 1992년부터 2012년에 걸쳐 제사 공간인 사당과 생활 공간인 동재와 서재도 최근에 복원했다고 하지요.
외삼문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동재는직방재(直方齋)라고 현판이 걸려있네요.
오늘날로 치면 기숙사 같은 곳으로서 당시 유생들이 기거하던 공간으로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으로 된 동재에 겨울 볕살도 여행을 왔네요.
사당 경덕사(景德詞)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마치 하늘과 닿아 있나 싶게 높아 보입니다. 사실 덕곡서당과 사당 사이에 작은 문이 있어서 바로 연결되어 있지만 돌계단 아래에서 보는 묘미가 있을 것 같아 곁문이 아닌 아래로 내려와 돌계단으로 올라가 보네요.
서원의 건축 형식이 사당과 강당이 남북으로 나란하게 배치된 좌묘우학(左廟右學)의 형태이지만 사당이 강당 보다 조금 뒤쪽에 위치해 있답니다.
사당 앞에는 내삼문이 있는데 단청이 다른 건물과 달리 아주 화려하더라고요. 아마도 퇴계 이황을 사랑한 의령의 유림들의 정성 어린 배려와 후세에 그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전언이 아닐까 싶어지더라고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인 경덕사는 정면에 툇간을 두고 후면에는 통간 마루를 설치해서 위패를 봉안했다고 하는데 사당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밖에서만 찍었네요.
음력 2월 20일에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매년 춘향제례를 올리는데 모든 향사 의식은 도산서원과 같이 하기 때문에 '남쪽의 도산서원'이라는 별칭이 있다고 해요.
퇴계 이황선생과 매화 나무 그리고 사랑...
사당 주변으로 매화나무를 보았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혹독하게 사랑한 이황의 매화 사랑은 기록에도 남아있을 정도지요.
불행한 결혼생활로 인해 퇴계는 매화에 마음을 의지하고 정을 주었던 것인지 매화 사랑에 대해 그가 남긴 92제 107수의 매화시를 썼고 그중 62제 71수를 모아 놓은 <매화시첩>이란 책을 보아도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니 그에게 있어서 매화는 어쩌면 학문 수행의 동반자이자 벗이었고, 외로울 땐 아내가 되기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조선 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며,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대한민국에서 유통 중인 화폐 천 원권 지폐의 앞면 모델이기도 한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도 안동부 예안현 온혜리(現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할아버지 이계양(李繼陽)의 집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1570년(선조 3)에 사망했으며,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수(陶叟), 퇴도(退陶) 등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퇴계(退溪)이며, 시호는 문순(文純), 사후에는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던 인물이지요.
두 번의 결혼을 했고 모두 사별했지만 홀로 남은 장모를 마지막까지 사위된 자로서 잘 모셨다고 하는 일화도 유명하답니다.
두 번째 아내가 병으로 죽고 2년 뒤인 46살에 퇴계는 단양 군수로 부임한 곳에서 매화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두향(杜香)이라는 기생을 만나 9개월간의 운명 같은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또한 알려져 있지요.
10년 이상 애지중지하던 노매(老梅)를 퇴계에게 선물한 두향의 매분이 바로 퇴계가 죽기 직전 “매화에 물을 주라”라고 유언을 했던 그 매화였다고 야사도 전해지지요. 퇴계는 단양 군수 할 때 18살의 두향이를 만나 정분을 맺은 것으로 전해오지만 그 후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는 못했으며, 두향은 퇴계를 만난 이후 관기에서 벗어나 수절했고, 퇴계의 장례식이 끝난 뒤 강물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하니 이황에게서 매화, 그리고 두향의 사랑은 허허로운 그의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았나 싶어집니다.
봄이 가까이 옴을 알려주는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서 나무의 삶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려는 수많은 성리학자들의 의지이며 퇴계 이황의 삶에서도 엿볼 수 있지 않나 싶어집니다. 그가 후세에 남긴 영향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저술과 후학을 양성하며 삶의 가치를 드높인 인물이라는 점을 덕곡서원에서 다시금 깨닫습니다.
서재 존덕재(西齋 尊德齋)
정면 네 칸인 팔작지붕의 서재는 마루 2칸, 온돌방 2칸의 구조로 되어 있더군요.
서재 역시 동재와 같이 학문을 증진하기 위해 유생들이 기숙하던 곳이랍니다.
서재는 동재와 달리 언덕진 곳에 세워져 있어서 동재에서 바라본다면 정면의 모습이 온전히 다 보이지 않지만 나름 운치있는 배열이라 조선시대에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지형을 살려 건물을 지었음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건축미에 빠져들기도 했네요.
덕곡서원의 창건 연도에 관해서는 1654년 설, 1656년 설이 있으며 1660년(효종 5) 나라에서 '덕곡(德谷)'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답니다.
사액서원이라 하면 조선시대 왕으로부터 서원명 현판과 노비·서적 등을 받은 서원을 말한답니다.
서원의 이름은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종교 의식이나 역사적 사건 등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이를 왕이 이름 지어준다는 것은 그 당시 아주 큰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네요.
서재인 존덕재에서 바라본 덕곡서원의 정경입니다.
겨울에 방문을 했어도 을씨년스럽지 않게 포근한 느낌이 드는 모습은 언제라도 찾아와 학문을 탐구하며 매화를 사랑했던 퇴계 이황 선생의 모습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마음 가득히 의령을 품는 계기가 된 하루였습니다.
서원을 떠나기 전에...
덕곡서원 주차장 부근에 나무데크길이 있는데 출입을 제한했더군요.
덕곡서원과 아울러 좋은 관광상품이 될 것 같은데 출입통제가 어서 해제되어 멋지고 아름다운 이황 선생의 소문이, 멋진 의령의 풍경이 의령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가길 바라며 글을 맺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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