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의병의 도시 영천, 임란의병 한천전 승첩지
오래전부터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집요하게 민족의 심기를 불쾌하게 하는 왜구떼처럼
기세등등한 폭염이 제 집인 양 터를 잡고 도무지 물러날 기미를 보이는 않는 8월.
항일구국운동에 기꺼이 목숨을 던진 민초들의 자취를 찾아 의병의 도시 영천에 자리 잡고 있는
한천전승첩지를 찾았습니다.
영천은 임진왜란. 을사늑약, 한국전쟁등 우리나라 전사(戰史)중에서
극적인 승리로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투의 현장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영천 시내에서 37번 국도를 따라 보현산댐 방향으로 15km 이동하다 보면
영천 소방서 화남 119지역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맞은편으로 500m 남짓 올라가면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를 기록한
경상북도 기념물 156호 '임란의병 한천전승첩탑이 나옵니다.
한천전 승첩지는 임진왜란 발발 이후 영천지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승리한 곳입니다.
영천성 탈환작전 이전 여러 전투 중의 하나로 권응수의 신녕의병이 신녕현 동편 한천 대동에서 지역민을 노략질하던
왜군 13명과 첩자 일당 30여 명을 소탕한 전투로 비록 소규모의 전투이기는 하지만 영천성 수복의 계기가 된 전투입니다.
임진년 1592년(선조25년) 4월13일 17만여 명의 육군과 3, 4만 명의 수군을 동원하여
부산을 점령한 왜군에 의해 불과 보름 만에 한양이 함락되고 국왕과 관료들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4월 22일 영천성을 점령한 1,000여 명의 왜군들은 영천읍성을 거점으로
인근 지역민들에 대한 약탈과 방화 및 살육을 벌이는 백성에게는 공포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에 신녕현의 무인 권응수는 의병을 이끌고 1592년 5월 6일 신녕 동편 한천 대동에서 전투를 벌려 왜군을 격살하고,
백성을 괴롭힌 두목이자 관노(官奴)인 희손(希孫) 일당을 소탕하게 됩니다.
이 한천의 승전으로 고무되어 인근 제 읍성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7월 14일에는 박연전투에서 왜군 30여 명을 참살하고 총검을 다수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7월 22일에는 고현, 사천전투에서 생원 최인제와 전삼익, 전삼달 형제가 합류하여,
하양을 거쳐 대구로 진격하려던 왜구를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7월 27일 ‘창의정용군(창의정용군)’이라는 깃발아래 모인 3,650여 명의 의병들은
영천성을 수복하는 승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승리를 기억하기 위해 1992년에 한천 일대의 전승을 기념하고
참전 의병과 무명 병사의 제향을 목적으로 백의사(百義祠)와 충훈당을 건립하였습니다.
백의사에는 의병장 권응수(權應銖)[1546~1608]를 비롯, 정천리·정우번·조종악 등 42위의 의병과 무명 의사가 봉향되어 있다합니다.
2006년 2월 16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5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603년 2월 12일 선조실록에는,
'우리나라 장사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을 몰아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이 1등 공로이고, 그 이외는 권율의 행주 싸움과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사람들의 기대에 찰 뿐
나머지는 들어보지 못했다. 간혹 잘했다는 자도 겨우 한 성을 지킨 데 불과하다.'라는 선조의 탄식이 실려 있습니다.
선조가 강조한 것처럼 임진왜란 초기 암울한 민족에게 왜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영천성수복전투!
이 전투의 초석이 된 한천전승리가 쌍사자 석탑의 용맹한 자태처럼 남아있는 곳!
임란의병 한천전 승첩지가 퇴색되어가고 있는 항일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임란의병 한천전 승첩지
영천시 화남면 천문로 1749-61(삼창리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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