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해설사들의 의미 있는 워크숍

단풍이 예쁘게 물들어가는 10월의 아침,

하안문화의집 마당에 모인 지역문화해설사들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합니다.

오랜만에 워크숍을 떠나는 날이거든요.

광명문화원 홈페이지 : https://www.gmcc.or.kr/

광명문화원 소속으로 2008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해설사는 현재 총 20명이며,

광명시 관내 초등 3학년을 대상으로 광명문화답사 수업을 진행하는 활동 외에, 광명 향토문화와 인물 콘텐츠의 발굴, 기록, 보급 확대를 위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랜 만에 떠나는 이날 워크숍의 주제 역시 광명의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데요, 바로 영회원의 주인공인 ‘민회빈 강씨’의 후손을 찾아 나서는 일정입니다.

고양시 대자동에서 만난 강빈의 후손들.

해설사들을 태운 버스는 쾌청한 아침 햇살을 뚫고 곧게 뻗은 도로를 미끄러져 나갔고,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고양시 대자동!

경안군 묘와 임창군 묘(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호)는 큰 길가를 벗어난 작은 마을에 모셔져 있습니다.

해설사들이 도착한 곳에서는 감사하게도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후손들이 나와 우리들을 반갑게 환대해 주셨습니다.

전주이씨 소현세자파종회 회장 이우홍님(12대손), 종손 이동기님(13대손)이시며,

이우홍 회장님은 2019년부터 거행된 광명시 영회원 기산제가 실현될 수 있도록 많은 힘을 보태신 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답사 해설은 신춘호 박사님이 맡아주셨는데요.

박사님은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를 운영하시며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행적을 매우 상세히 연구하고 계시며, 민회빈 강씨를 매개로 이전부터 광명지역문화해설사들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고마우신 분입니다.

전쟁이 앗아간 권좌, 비운의 왕자들

경안군의 아버지 소현세자는 인조의 적장자였고, 경안군은 그의 적자였기에 조선의 장자 승계 원칙에 따르면 그들 모두 군주가 되었어야 할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에 패한 조선의 세자와 세자빈은 볼모로서 청으로 보내졌고

약 8년 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얼마 되지 않아 소현세자는 병사하고, 곧이어 인조 독살 혐의를 받은 민회빈 강씨는 사약을 받게 됩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모두 제주로 유배에 처해져,

둘은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셋째 아들 경안군 이회(李檜)만이 유일하게 유배에서 풀려나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으나, 오랜 유배생활로 인한 건강 악화로 인해 22세의 나이에 요절합니다.

경안군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혼인하여 슬하에 2 남을 두었는데 임창군, 임성군이며 오늘 광명지역문화해설사들이 찾아온 이 곳에 모두 함께 계십니다.

조금 높은 곳에 모셔진 봉분이 인조의 손자이자 소현세자와 강빈의 셋째 아들인 경안군의 묘소이고, 그보다 조금 낮은 앞쪽의 봉분이 경안군의 장남인 임창군의 묘소입니다.

가까이 있는 임창군의 묘를 먼저 살펴봅니다.

임창군은 응천군 부인 박씨와 함께 묻힌 합장묘인데요, 겉으로 보기에 왕실의 그것이라 하기에는 많이 소박합니다.

곡장과 둘레석이 없는 봉분, 소담한 크기의 제단석과 향로석은 여느 집 무덤들과 크게 다르지 않고,

묵묵한 표정으로 서 있는 문인석과 망주석은 이 무덤의 주인이 비교적 식자층에 속했음을 추측하게 하며,

앞쪽에 세워진 묘비를 읽고서야 비로소 무덤의 주인이 슬픈 운명을 살다 간 왕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묘비의 글씨는 임창군의 차남 밀남군 이감(李堪)의 것입니다.

혈통적 정통성이 강하게 남아 있음에도 권력 구도에서 비껴난 왕족이 어떻게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지, 사후의 시간까지도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려옵니다.

경원군 묘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경사진 계단을 따라 올라갑니다.

붉은 벽돌로 조성된 곡장은 근래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고, 묘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이 배치 되어 있습니다.

경원군 묘에서 바라본 앞쪽의 풍광이 시원스럽습니다.

아래로 그의 맞아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도 눈에 잘 들어옵니다.

분성군 부인 김해 허씨와의 합장묘로 조성되었으니 경원군은 이 자리에서만큼은 후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당신의 배우자와 함께 아들들을 바라보며 편안히 쉬셨겠구나… 위안이 되는 경치입니다.

발길을 옮겨 경안군 묘의 오른쪽 산기슭에 위치한 그의 차남 임성군의 묘에도 들렀습니다.

익성현부인 남양 홍씨와의 합장묘인데,

경안군, 임창군의 묘와는 달리 나무가 빼곡한 숲 한가운데에 자리한 탓에 볕이 들지 않아 봉분에 입힌 잔디가 자라지 못해 헐벗은 듯한 모습이 조금은 허전합니다.

이제는 강빈의 아들(경안군)과 손자들(임창군, 임성군)에 이어 증손자를 만나러 갑니다.

바로 임창군의 장남 밀풍군 이탄(李坦)의 묘입니다.

영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꾀했던 이인좌의 난에 휘말려 32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자결해야 했던 비운의 왕손!

확고한 적장자의 혈통을 가진 채로 왕이 되지 못하면, 비극은 이처럼 잔인하게 대물림이 됩니다.

망주석 2기, 동자상 2기의 석물과 상석, 향로석이 배치 되어 있고, 비교적 최근(2007년)에 세워진 묘비석이 있습니다.

밀풍군의 묘 역시 합장묘입니다.

정실 군부인 청풍 김씨와 계실 군부인 임천 조씨가 함께 잠들어 계십니다.

밀풍군 묘 아래쪽에 자리한 장남 관석(觀錫)의 묘를 밀풍군이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듯 합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을 끝까지 섬긴 명의 궁녀 굴씨(屈氏)

밀풍군 묘 맞은편으로 5분쯤 산길을 걸어가다 보면 자칫 지나치기 쉬운 무덤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명나라 궁녀 굴씨(屈氏)의 무덤입니다.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가 2001년에 역시나 소현세자 파종회에서 묘역을 정비하고 비석을 세워 관리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굴씨는 명의 궁녀였다가 명이 청에 패망한 후 그대로 청 황실에 귀속되었고, 볼모로 청에 끌려온 소현세자와 민회빈을 모시다가 소현사제 일행이 조선으로 환국할 때 함께 왔고, 그들 모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조선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조선에서 사셨다고 합니다.

소현세자 일가 만큼이나 기구한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그녀의 무덤 앞 제단에 가을 알밤과 도토리가 놀러 왔네요.

이 곳에 누워 셀 수 없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냈을 그녀에게 이런 작은 친구들이 자주 놀러와 그녀가 부디 외롭지 않기를 바랍니다.

답사를 마치고…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기 전 경원군 묘를 향해 모두가 짧은 묵념을 올렸습니다.

경원군의 후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종친들도 안 계셨을 테니, 소현세자와 민회빈에 대한 복원 등이 오늘날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수 있었겠지요.

모든 답사 일정을 마친 그곳의 하늘은 무심하리 만치 맑고 푸르렀어요.

이렇게나 서글픈 사람들의 무덤을 비추는 햇살이 너무 투명해서 어색했지만,

또 한편 그래서 고맙기도 합니다.

광명의 역사문화재 속 인물, 민회빈 강씨의 후손들과 조우한 하루는 먹먹하고 아련했지만, 그만큼 알차고 보람되었습니다.

작은 봉분 하나마다 역사와 세월과 이야기가 가득하여 하루 해가 짧게 느껴질 정도였지요.

오늘의 답사는 지역문화해설사들에게 분명 광명에 대한 더 깊고 풍부한 영감을 갖게 하는 뜻 깊은 시간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광명문화원 홈페이지 : https://www.gmcc.or.kr/

광명시 온라인시민필진 카라반(정연주)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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