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시간 전
[6월 의령 여행/의령의 인물과 고택] 시간의 뒤안길에 서 있는 미연서원과 의령의 인물 미수 허목
[6월 의령 여행/의령의 인물과 고택]
시간의 뒤안길에 서 있는 미연서원과 의령의 인물 미수 허목
인구수는 적지만 유명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의령군은 인물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 백산 안희제 선생 등 역사적 인물이 많은 의령에 조선 후기의 문신인 허목의 흔적이 있는 곳이 있어 다녀왔답니다.
미연서원 가까이 다다랐을 때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 도착한다 싶었는데 휙~ 지나 버리는 바람에 ...
미연서원 앞에 주차할 만한 곳이 마땅찮아 맞은편에 있는 교회 앞 길가에 주차를 하고 서원을 향해 갔네요.
의령 미연서원(宜寧 嵋淵書院)
의령 미연서원(宜寧 嵋淵書院)
- 주소: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모의로 323
(지번. 중촌리 765-1)
-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2014년 9월 25일 지정)
1825년 남인계 인사들과 양천 허씨 후손들의 발의로 조선 후기 허목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에 창건한 미연서원의 모습입니다. 도로와 연접한 관계로 둘러보기 위해 들를라 치면 안전을 요하는 문제가 있긴 하더군요.
막상 도착해서 보니 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서원과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기거하는 고직사가 있긴 했지만 무성한 풀을 보니 그곳 역시 협문은 닫혔을 것 같아서 다시 대문 앞으로 왔네요.
정면 3칸 솟을대문인 인지문(仁智門)은 밖에서 안으로 출입하게 하는 출입문이었는데 다시 보니 방문하는 사람들이 직접 여닫을 수 있도록 특별한 잠금장치는 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조선 시대의 서원은 지방 교육의 상징적인 장소로,
학문을 연구하고 신현들의 제사를 지내며
각 지방의 고급 인재들이 수시로 출입하고 교류를 하던 장소이다.
의령 미연사원은 조선 후기 문신인 미수 허목을 기리기 위해 순조 25년(1825)에 지은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손되었다가 1901년에 다시 지었다.
-중략-
안내문을 읽어보고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미연서원은 사당인 숭정사, 강당인 이의정, 책을 보관하는 장판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던 강당인 이의정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의 건물이었답니다.
조선 후기 문신이며 학자였던 허목(1595 ~ 1682)은 문보(文父),화보(和父),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삼고(三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증조할아버지는 의정부 찬성 허자(許磁)이고, 할아버지는 별제 허강(許橿)이며, 아버지는 연천 현감 허교(許喬)이며, 어머니는 나주 임씨로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고, 부인은 전주 이씨로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라고 하는데 쟁쟁한 집안의 내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랍니다.
미수 허목은 자신이 쓴 초상화 자찬(自讚)에 '몸이 마르고 키가 크며 이마가 움푹하고 수염과 눈썹이 길고, 손바닥에 글 문(文)자 무늬가, 발바닥에는 우물 정(井)자 무늬가 있고, 성격은 담담 화평하다'라고 하였다는데,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별호를 미수(眉)라 했다고 자서(自序)에 전하고 있답니다.
1825년 의령군 대의면 행정리에 미수를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미연서원(嵋淵書院)이 건립됐지만,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없어지고, 영정 및 연보 판각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은거당(미수의 노년 삶을 위해 숙종이 하사했던 집)으로 보내졌고 그후 1920년에는 연천 은거당에 있는 영정을 이의정으로 다시 옮겨와 봉안하였으나, 지금 이의정에는 도난을 염려하여 모본을 모시고 진본은 서울에 보관하고 있다고 해요.
현재는 이의정에 '미연서원' 현판이 걸려있고 이의정 현판은 현대 서예가 양진니씨가 7세에 쓴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답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미수는 강원도로 피란을 하였다가 선대의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오니, 동생인 죽천(竹泉) 허의(許懿)가 모친을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고 없었는데, 죽천은 경남 사천에 있는 퇴계의 제자 귀암(龜庵) 이정의 손서였으므로, 처가가 있는 사천으로 갔다가 다시 의령군 대의면 행정리로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해요.
행정리는 죽천의 처외가인 순흥 안씨들이 살고 있는 고장이었는데, 미수는 모친이 계신 의령으로 내려와 모친이 돌아가실 때까지 의령에서 지내면서 세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놓은 것이 지금의 행정리라는 지명이 되었다고 하지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던 미수는 천문, 지리, 의학 등 백가서를 탐독하였고, 경학과 예학에 박통하였던 미수 허목의 32세 때인 동학 재임(東學齋任) 시절, 인조의 생모 계운궁(啓運宮)을 추숭(追崇) 하자는 제의를 하자 그는 박지계가 임금에게 아첨하여 예를 문란시켰다고 비판한 것으로 인해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 당한 적도 있었답니다.
56세 되던 효종 원년 정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63세에 지평(持平)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오른 후 조정은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服喪問題)를 놓고, 서인 측에서는 1년을 주장하였고 남인 측에서는 3년을 주장하던 차에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미수는 66세에 삼척부사로 나가게 된답니다. 그 당시 삼척에는 해일로 피해가 막심하였는데, 192자의 전서체로 써서 새긴 척주동해비를 세워 해일을 밀어낸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지요.
미연서원은 여느 서원처럼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인 동재 서재가 없고 동재로 보이는 건물은 3칸으로 지은 장판각이랍니다. 허목 미수기언 목판(미수 허목의 시문집인 '미수기언'을 책을 만들기 위한 목판)은 허목의 사상과 학문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현재는 의병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랍니다.
입구에서 서쪽에 있는 이곳이 정면 3칸의 서재 건물인데,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 온돌방 1칸씩 배치되어 있어 학생들이 기숙하며 사용했다고 하지요.
장판각과 서재 쪽에서 바라본 솟을 대문채에는 출입문을 중심으로 각각 좌우에 방 1칸과 창고 용도로 사용하는 건물 구조였답니다.
이곳이 의령의 문화재인데 웃자란 풀들과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편치 않더군요.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고, 45년 후 1901년 현재의 자리에 이의정이 건립되어 미수를 추모하며 이의정을 건립했을 당시 의령군민과 창녕군민들이 힘을 모아 기와를 날랐다고 전하는데 역사는 시간의 뒤안길에 파묻혀 버렸나 싶게 씁쓸한 여운을 안겨 주는 것이 ...
아름다운 의령의 역사와 문화 공간 속에서 시간까지 하나가 되어 오늘을 살아가는 세대가 내일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인 미연서원을 의령군에서 좀 더 관심을 가져주시면 의령의 위상이 높아지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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