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장소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분이신 이상설 선생님은 태어난 곳이 진천이며, 그분의 생가를 재현한 곳을 방문하였습니다. 특히, 역사적 배경지식이 있다면 이곳을 방문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둘러보아야 하는지 알게 될 텐데요. 이상설 선생님은 1905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이 있었던 해가 중심이 됩니다.

이상설 선생님은 1870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에서 태어나시면서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나중에 가서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부 관리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과 비교하면, 고시 수석 합격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만행으로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고, 이런 억울한 상황에 대하여 세상에 알리고자, 고종황제의 명으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가게 된 것입니다.

잠깐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당시 세계 상황을 설명하자면, 전 세계를 식민지로 강탈하던 강대국들이 이제는 서로 간의 충돌을 예방하고자 또는 더 교묘하게 식민지를 확장하고자 내세운 기준을 정하는 회의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했는데, 그 1차 회의는 1898년, 2차 회의는 1907년에 개최되었고, 이후 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개최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곳 회의에서는 전쟁에 관한 규칙과 중립 및 중재에 관한 내용을 담은 13개의 협약이 체결된 자리였습니다. 당연히 회의 주최자들은 당시 존재감이 없었던 우리나라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우리나라의 특사는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선생님 중 이준 선생님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현지에서 돌아가셨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고 합니다.

이상설 선생님은 만주지방 하얼빈의 동쪽 북간도에 서전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쓰셨고, 헤이그 특사 파견 외에도 돌아가실 때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이 태어나신 곳이 내가 사는 진천이고, 그분이 계셨기에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내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상설 선생님의 걸어오신 발자취를 따라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설 생가 외에도 그분을 기리는 숭모비와 숭열사도 있어 같이 돌아볼 수 있으며, 유물전시관에서는 보다 자세한 당시의 이야기와 유물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생가를 재현하고 활동사를 되돌아볼 수 있게 조성한 곳이 매우 뜻깊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 반면, 이야기를 더 들여다보고 있자니, 생각보다 많이 알려지지 못한 부분이 있어, 지자체 차원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이상설 선생님에 대한 홍보와 추대가 더 강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나라를 빼앗긴다면 나는 이상설 선생님과 같이 목숨을 다하여 독립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물음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럽습니다. 언젠가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도록 계속하여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본받고 역사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진천 이상설 생가

주소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이상설안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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