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고장 의령 충익사에서 나라사랑을 배워 실천해요

의령군 블로그 기자단 서정호

의병장 18분의 위패를 모신곳

충익사

주소 :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왜적이 조선을 침략해 왔을 당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서 막아냄으로써 위난의 국가를 지켜낸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나라 사랑의 위업을 역사 만대에 알리여 나라 사랑에 교육장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조성한 충익사 성지이며, 임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력 하신 의병장 18분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충익사에 입장하여 돌아본 내용을 위패를 모신 곳 기념관 기타 내용 순으로 정리하여 리포트 하겠습니다.

의병탑

충익사 탐방을 위하여 의령천 다리는 건너면 정면에 의병탑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원형으로 되어 있는 구조물이 양쪽에 쌓아 올린 구조물 사이에 설치된 형식이며, 원형 구조물 하나가 의병장 한 분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18개의 구조물로 되어 있다고 전합니다.

의병탑 아랫부분에는 제단과 그리고 양쪽에 태극문양이 새겨진 북을 두 곳에 설치한 형상으로 구 안 되어 설치되어 있습니다.

탑의 아랫부분에 왜적에 항거하여 맞서 싸운 의병의 모습을 부조화로 조각하여 설치되어 있지요

탑에 설치한 원형의 구조물을 탑 아래에서 위 하늘을 바라보며 촬영한 18개의 원형 구조물이랍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면 설계를 한 지도층의 유지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의병탑 제단에서 뒤로 돌아서 바라보면 의령군청 건물의 현관을 마주 보게 정면으로 되어 있는 모습이 큰 의미를 느끼게 되었으며, 군청 건물 바로 뒷산에 위령탑이 보여 세 곳의 연결이 참 기막히게 잘 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충익사로 입장하며

신성한 곳에 설치되는 홍살문이 설치되어 있어 충익사의 의미를 생각하며 통과합니다.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스테인리스로 아주 높게 설치한 국기게양 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국기 게양대는

의령군 출신으로 전국에서 제일 장학사업을 활발하게 펼쳐 널리 소문이 나 있는 이종환 님의 기증으로 건설된 국기 게양대입니다.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스테인리스로 아주 높게 설치한 국기게양 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국기 게양대는 의령군 출신으로 전국에서 제일 장학사업을 활발하게 펼쳐 널리 소문이 나 있는 이종환 님의 기증으로 건설된 국기 게양대입니다.

충익사에 입장하는 첫째 문 충의문

충의문에 연결된 담장 안으로 왼쪽에 3그루 오른쪽에 4그루의 조경수가 탐스럽게 잘 가꾸어져 충익사를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충의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2호 의령 충의각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곽재우와 그의 아래에서 활약한 장군 17명의 이름, 본적, 본관, 호, 벼슬 등을 기록한 명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이다. 원래 이건물은 1910년에 합천 이씨 문중에서 의령읍 동동리의 관찰사를 지낸 이중하를 기리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1972년에 재부산향우회에서 이를 매입하여 충익사 인근으로 옮겨 왔고, 197년에 충익사 정화 사업을 하면서 이곳에 자리잡았다.

전물은 앞면 2칸, 옆면 1칸의 규모로, 옆에서 보았을 때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아래에 달린 목재 구조물의 높이가 매우 높고, 지붕의 면적도 넓다. 극락세계에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상여 모양을 본떠 지은 건물로 장식성과 예술성 그리고 기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참고 : 안내문 전재함> 충익사 입장하는 왼편에 충의 각 건물이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습니다. 충의 각 내부에는 아래에 게시되어 있는 사진의 내용과 같이 임란 창의 18장 제위 위패를 기록한 내용이 게시되어 있어요

임란창의 18장 제위

충의 각의 단청 색이 곱습니다. 옛 선조분들은 나무를 목각으로 아름답게 다듬어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 자체로 연결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꽃집을 지었습니다.

충의 각을 조금 떨어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건물이 아니라 하나는 꽃송이를 나무 조각품으로 만들어 놓은 예술 작품으로 생각하게 되며 이음새에 나무에 홈을 파 연결하고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단한 기술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곽재우장군 유적 정화 기념비

충익사

충익사에 입장하는 홍의 문입니다. 홍의 문 앞에 탐스럽게 잘생긴 반송 두 그루입니다.

경건한 자세로 입장합니다.

임란 창의 의병장 신위 봉안

의병장 18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 나오려고 뒤로 돌아서 홍의 문 안쪽 부분을 바라보면 역시 안쪽에도 반송 두 그루가 참하게 충익사를 지키고 있습니다.

기념관

곽재우 장군 신도 비문 탁본 곽재우 장군 보덕 불망비문 탁본

보덕각 유허비 문과 충익공 곽재우 장군 연보

보덕각 유허 비문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 어허! 여기는 홍의 곽재우 강군의 유허지 이다. 장군의 출생이 여기요 창의 기병한 곳도 여기이니 고을 사람들의 뜻을 세우고 창군의 뜻을 길이 잊지 않음이 마땅한 일이다.

선조 임진왜란에 장군은 선비로서 갈 짚고 소리 높여 외치니 많은 의사가 모이고 창과 칼은 해를 기리어---‽

의병 창의도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채 열흘이 지나지 않은 4월 22일 곽재우 장군은 유곡면 세간리에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다. 장군은 먼저 개인재산을 털어서 군비를 마련하고 가동(사노비) 10여 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뛰어난 지략과 활약으로 곽재우 의병부대의 수는 50명 수백 명 2천 명으로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곽재우 장군 기마도

화왕산성 대치도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곽재우 장군은 경상좌도 방어사로서 밀양, 현풍, 창녕, 영산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으로 들어갔다. 부대의 대오를 엄격하고 전투태세를 완벽하게 구축한 망우당은 적장도 병법을 안다면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다. 라면서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는 산성에 당도하여 밤낮으로 성 주변을 면밀히 살폈으나 허점이 없음을 알고 승산이 없다. 판단하여 물러났다.

기강전투도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기장에서 벌어진 전투로 의병부대의 첫 전승지이며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주력부대가 북상하면서 낙동 강릉 이해 병력과 군수물자를 운반하자 1592년 5월 4일 두 차례 걸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선을 격퇴했다.

망우정 정자를 세웠으며, 방문하신 이들의 흔적남기가와 퍼즐 맞추기 코너가 설치되어 있어요

의령군내 각급학교의 학생과 교직원의 성금으로 기념관 내에 실시간으로 우리나라 동해의 독도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영상장치를 설치하였습니다.

충익사 경내 조경수 몇 그루

충익사 정문을 나서면 충익사 호수 부근에 잘 조성된 정원수가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충익사 입장하는 홍의 문 앞쪽의 두 그루 반송과 또 안쪽에 두 그루의 반송이 시선을 끌고 있었어요

충익사 경내에서 조경수로서 제일 관심을 두는 모과나무 수령이 500년이 넘은 의령 충익사 귀목이지요

배롱나무를 군락으로 조성하여 조경한 곳입니다.

충익사 경내에 잘 관리되고 아름다운 호수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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