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독산성의 승리가 행주대첩의 위대한 업적으로 이어지다 <시민기자 김현학>
우리고장 오산은 지정학적인 이유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국난극복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어왔다. 독산성 세마대는 권율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병사들이 왜군을 맞이하여 치열한 공방전끝에 지켜낸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죽미령고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남하하는 북한 공산군들을 저지하기위하여 급파된 유엔군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북한 공산군과 최초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로 볼때 오산은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국가를 위기로부터 지켜낸 역할을 다하였던 곳이라고 가히 말 할 수 있겠다.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3월에 독산성에 올라 궐율장군과 조선군 병사들의 뜨거운 항전과 승리를 되돌아보는 것은 권율장군과 그를 따르던 조선군 병사들이 독산성에서의 왜군을 물리친것에 크게 고무되어 바로 북상하여 왜군에게 빼앗긴 한성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에서 왜군과 대치하던중 그 유명한 행주대첩으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 날이 바로 3월 14일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로 불리는 행주대첩은 1593년 2월 12일(음력. 양력으로는 3월 14일) 단 하루 동안 벌어진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 전투였으며 이를 이끈 장군이 권율장군이었다. 장군은 냉철한 판단력과 리더십으로 단 2,880명의 조선군으로 왜군 3만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이 전쟁의 판세를 뒤집고 한성을 왜군에 빼앗긴 지 1년 만에 다시 수복하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권율 장군은 10대 1의 수적 열세 속에서도 객관적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하였다.
권율 장군은 임진왜란 기간 중 독산성을 비롯하여 많은 전투에서 기지를 발휘해 휘하의 군사들과 지역 백성을 지키고 결국 나라를 구했다. 군사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투구를 벗어 물을 따라주던, 뛰어난 전략으로 기지를 발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던, 판세를 뒤집고 결국 재난을 극복해 낸 그의 리더십을 떠올려 볼 때 권율 장군은 숱한 고난 속에서도 국가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위기를 딛고 일어나 승리를 거두었다.
▲ 독산성 세마대 앞으로는 화성시와 오산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장관을 이룬다. 권율 장군과 조선 병사들이 지켜낸 이강토가 오늘날 이처럼 번영을 누리고 있음에 감탄과 감격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산성 세마대 앞면(남쪽방면)에는 세마대(洗馬坮)로 고 이승만 대통령이 쓴 편액이 걸려있고 뒷면에는 누가 썼는지 알수 없는 세마대(洗馬䑓)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1592년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한양을 탈환한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도순변사 권율 장군은 지금이 한양탈환의 적기라 생각하고 군대를 이끌고 한양탈환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중이었다. 그러나 북상중에 비보가 날아들었는데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벽제관싸움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해 다시 평양성으로 돌아 갔다는 소식이었다. 권율 장군은 어쩔수 없이 독산성으로 들어가 진을 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들은 권율 장군이 거느린 조선군 병사들이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위협을 느꼈다. 수원은 남쪽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조선군이 수원을 차지하고 있다면 남쪽에서 한양으로 오는 보급선이 끊어지게 된다.
당시만 해도 해로는 해상권을 장악한 이순신 장군 때문에 막혀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 부대는 조선군을 치려고 수원 화산 산성(독산성)을 향해 진격했다. 화산 산성은 수원 평야 안에 우뚝 솟아 있는 산성이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바위산이어서 ‘독산성(禿山城)’이라 불리우고 있었다. 몇번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가고 특히 밤에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오는 조선군을 일본군이 쉽사리 물리치기 어렵다고 판단한 왜장은 독산성이 바위뿐이어서 물이 없을것으로 판단하고 물이 떨어질때까지 기다리는 지구전으로 들어갔다.
왜병들이 공격해 오지 않자 조선군 병사들은 왜군의 작전을 알아차리고 절망하였지만 보고를 들은 권율 장군은 군사들에게 걱정할 것 없다고 하면서 왜병들이 가장 잘 보이는 산성 꼭대기에 말을 세우고 쌀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이윽고 권율 장군은 말을 세우고 말등에 쌀을 부으면 멀리서 보면 물로 말을 씻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병사들은 산성 꼭대기에 말을 세우고 말 등에 쌀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말을 목욕시키는 듯 솔로 말 등을 문질렀다. 왜병들은 산성 아래에서 이 광경을 보고서는 조선군 병사들이 말을 씻기는 것을 보니 독산성 안에 물이 얼마나 많으면 말을 목욕시키기까지 할까 생각하고서는 독산성을 포위하고 기다려 봐야 아무 소용이 없겠다고 판단하여 다시 한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뒤 독산성에서 군율 장군이 말을 목욕시킨 곳이라하여 ‘세마대(洗馬臺)’라고 불리게 되었다.
▲ 독산성 앞으로 뻗어내린 오산신도시 시가지가 파노라마처럼 뼐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권율 장군이 조선군 병사들을 지휘하였던 장군바위가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듯 하다.
▲ 독산성 동문에서 남문으로 가는 방향으로 난 성벽일대의 모습이다. 전면에 성문이 완벽해게 복원되지 못한 남문이 보인다.
▲ 남문밖에서 서쪽방향으로 난 성벽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본 모습이다.
▲ 독산성 남문 일대의 성벽의 곡선미와 함께 미려함과 장려함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3월을 맞이하여 봄기운이 완연한 날 가족들과 함께 독산성을 걸으면서 독산성이 간직한 선조들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와 함께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의 영달보다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한 권율 장군의 충정을 느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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