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나요? X 고유한 자산

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지로 전국 쌀 생산량의 40분의 1을 책임지는 김제. 이곳 장화 2길 150-5 정종수 고택에는 집채만 한 쌀뒤주가 있다. 요즘에는 뒤주를 보고 들을 일이 적어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를 떠올리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영화 ‘사도’에서 본 뒤주는 기껏해야 서랍장 크기였는데 장화리 쌀뒤주는 왜 이렇게 크게 만들었을까?


나눔의 미학, 정이 넘쳐흘렀던

지평선이 드넓게 펼쳐진 김제는 예로부터 호남 최대 곡창지대였다. 비옥한 토양과 너른 평야는 벼농사에 적격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김제에는 유난히 부를 상징하는 천석꾼이나 만석꾼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정씨 집안은 조상 대대로 만석꾼 집안으로 불렸다. 그 때문에 과객이나 식객들이 매일 수백 명씩 찾아들었고, 정준섭은 그때마다 손님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작은 궤짝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자, 안마당에 초대형 쌀뒤주를 만들었다. 너비 2.1m, 높이 1.8m로 얼핏 보면창고로 보일 정도의 크기다. 볏짚으로 지붕처럼뚜껑을 만들어 씌운 독특한 외형이 특징이다. 보통 쌀뒤주가 1~2가마 정도 들어가는 크기라면 이곳 장화리 쌀뒤주는 70가마가 들어갈 정도로 넉넉하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더 탐내고 인색하다는 걸 꼬집는 ‘가진 놈이 더 한다’는 말이 있다. ‘가진 놈’이었던 정준섭은 뒤주를 가득 채울 만큼의 곡식을 가졌지만 거드름 피우거나 욕심내지 않았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해 큰 뒤주를 만든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게 아닐까. 오늘날 장화리쌀뒤주는 집을 찾는 사람들을 정성으로 대한 정준섭의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민속자료가 되었다. 이제는 후손의 이름을 따 ‘정종수 고택’ 으로 불린다. 나눔의 미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가치를 인정받아 전북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사라져가는 뒤주, 그 많던 쌀은 어디로 갔나

본디 뒤주의 역할은 습기나 해충으로부터 곡식을 보호하는 것이다. 통나무나 널빤지를 짜서 궤짝 형태로 튼튼하게 만들고 네 개의 기둥과 짧은 발이 곡식의 무게를 지탱한다. 하지만 장화리 쌀뒤주는 특별하다. 어려운 사람들의 배를 따스하게 불려주었기 때문.

과거에는 쌀을 저장하는 뒤주야말로 부의 상징이었다. 농경사회에서는 지금의 금고나 마찬가지였을 터. 시대가 변하면서 그 역할을 대신하는 쌀통이 생겼지만, 쌀 소비량이 줄면서 그마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사라져가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이웃과 나누던 정, 인심 좋던 우리 고유 정서가 메말라 가고 있다. 콩 한 쪽도 떼어먹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내 것 챙기기에만 급급하다.그래서일까. 옆집, 앞집과 반찬을 나누던 정, 덤으로 하나씩 더 얹어주던 인심은 더욱 귀해졌다. 장화리 쌀뒤주를 보며 나눌수록 배가 되는 기쁨에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쌀은 금방 줄지언정 손님을 대접하던 정준섭의 마음은 풍요로웠을 것이다.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인심이 필요한 때다.



글, 사진 = 전북특별자치도청

사진 = 디지털김제문화대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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