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곡성 인문학 여행편에서는 입면 제월리에 있는 함허정과 정자를 세운 주인공 심광형 선생을 소개합니다. 요즘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벌거벗은 한국사 등을 통해서 인문학 여행도 얼마든지 재미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읽어보세요. 섬진강 함허정이 보다 특별한 공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진정한 선비 함허정을 세운 심광형 선생

함허정을 세운 제호정 심광형 선생 (沈光亨, 1510~1550)은 어떤 분일까요. 출신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심광형 선생이 탄생한 집안 청송심씨 가문은 청주한씨와 더불어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정승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입니다. 세종대왕비(妃) 소헌왕후가 이 집안 출신입니다. 심광형 선생 할아버지가 남원부사, 해주목사, 병조판서를 역임한 분이니 아마 당시 옥과 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안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심광형 선생은 전라도 관찰사가 임금에게 직접 천거할 정도로 학식과 인품이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후학 양성에만 전념한 진정한 선비였습니다.

선생이 벼슬에 나가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말 우국지사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의 언급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 단종 임금이 왕위를 뺏기고 비참하게 돌아가신 일을 보면서 권력과 부귀영화에 미련을 두지 않고 초야에 묻혀 선비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셨다. ] 중종 임금은 선생을 중용하려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자 그 뜻을 존중하여, 옥과현 인근 지역인 광양. 곡성. 담양 출신 인재를 양성하는 임무인 중학훈도의 직을 내렸습니다.

함허정이 지어진 시기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강학 하다가, 1535년 섬진강 변 군촌( 제월리의 옛 이름 )에 터를 닦고 처소와 학당을 겸한 군지촌정사를 열었습니다. 이후 이곳을 인재 양성을 위한 기숙학교를 겸한 선비들과 활발하게 학문을 교류하는 공간으로 삼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군지촌정사가 학당으로서 어느 정도 규모로 운영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된 문헌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시 정황과 주변 인물의 문집에 실린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심광형 선생은 하서 김인후가 옥과 현감을 지낸 것을 계기로 고봉 기대승, 율곡 이이를 비롯한 조선 중기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던 것 같습니다.

군지촌정사가 문을 연지 8년이 지난 후 1543년, 뒤편 동산에 함허정을 지었습니다.

함허정의 경관과 풍수

500년 전 함허정 인근 섬진강 풍경은 지금과 크게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불과 50~60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 섬진강엔 제방이나 제월섬에 가로막힘 없이 시야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합강에서부터 시작되는 만곡부에는 광활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짙푸른 섬진강물이 함허정 언덕을 돌아 굽이쳐 흘러내렸습니다. 새로 부임하는 옥과현감이 지역의 유력한 선비들을 이곳으로 초청하여 향음례를 베풀었을 만큼 경관이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함허정은 풍수가들의 입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오르내린 곳입니다. 누정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함허정의 이러한 측면을 자주 인용합니다.

우선 함허정과 군지촌정사가 있는 자리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면모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동악산은 황소가 강가에 한가로이 누어 있는 와우형으로 비유되고, 동산은 목동이 강가에서 피리를 부는 형국이라고 합니다. 도학자들이 이상으로 삼는 안빈낙도하기엔 최적의 풍수지리 조건을 갖춘 여유롭고 풍성한 기운이 흐르는 곳입니다.

군지촌정사 뒷 동산은 거북이가 용궁으로 들어가는 형국의 혈맥인데 그 위에 함허정이 앉아 있습니다. 함허정 아래 물속에 잠긴 바위는 거북 혹은 용을 닮아 용암이라 하는데, 이는 해중 신선경(海中 神仙景)으로 해석됩니다.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는 풍수적 의미를 지닌 곳이라고 하네요.

조선 시대 선비들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와 명리학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함허정이라는 이름을 쓴 것을 보면 심광형 선생도 도가 계열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치밀한 풍수적인 고려를 통해서 군지촌정사 텃자리를 정하고, 함허정을 지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안빈낙도와 후진 양성에 힘썼던 심광형 선생의 정신세계가 군지촌 정사와 함허정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함허정 이름에 담긴 뜻은?

원래 함허정은 동산 정수리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지금은 작은 쉼터 하나가 옛 터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함허정 옆 계단을 이용하면 소나무가 운치를 더해주는 그곳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심광형 선생이 맨 처음 사용했던 명칭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함허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함허(涵虛)란 이름은 당나라 맹호연의 시 "(8월에 잔잔히 빛나는 동정호를 허공을 담아 태초의 푸르름과 뒤섞네"[八月湖水平涵虛混太淸]에서 인용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함허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는 도가의 무(無)와 불가의 공(空)을 의미하므로, 그 이름에서 도학자 심광형 선생의 이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함허정 현판 글씨는 누가 썻을까.

동산 위에 지어진 함허정을 받치고 있는 지반이 약해 허물어질 염려 때문에 후손 심민각이 지금의 위치로 함허정을 옮겨지었습니다. 5대손인 심세익 형제가 중수(다시 지음) 하면서 이름을 호연정으로 바꾸고 한동안 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세연정이라는 별칭도 이곳을 다녀간 선비들의 시구에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 심광형 선생이 명명한 원래 이름 함허정을 되찾게 됩니다.

힘이 넘치는 필체가 예사롭지 않은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 눌진 조광진과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일컬어지는 창암 이상만의 작품입니다. 현재 함허정에 걸려 있는 현판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별도의 장소에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

경관 명승은 감상 포인트가 어디냐가 중요

각 지역의 경관 명승지를 8경 또는 10경 등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문자로 표현된 것은 명승지 이름뿐이고 감상 포인트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포인트를 찾아야만 문자가 상징하는 8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곡성에도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덟 개의 경치 좋은 풍경 즉 곡성 8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함허정이 왜 거기에서 빠져있을 까요?

앞에서 감상 포인트가 중요하다고 했죠? 섬진강의 맑은 바람이라는 뜻을 지닌 제3경 순강청풍(鶉江淸風)과 옥과 설산 너머로 지는 일몰 풍경인 제9경 설산낙조(雪山落照) 감상포인트가 바로 함허정입니다. 지금은 주변이 달라져서 옛날 같은 풍경은 없지만 함허정에는 여전히 안빈낙도를 구가했던 선비문화의 운치와 품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함허정은 조선시대에는 호남의 4대 정자였고, 지금도 광주전남 8대 정자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참고로 광주광역시관광협회에서 선정한 광주․전남의 8대 정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광주 호가정 (浩歌亭)․ 담양 식영정(息影亭)․나주 영모정(永慕亭)․ 곡성 함허정 (涵虛亭)․ 화순 물염정(勿染亭)․ 영암 회사정(會社亭)․ 장흥 부춘정 (富春亭)․ 완도 보길도 세연정(洗然亭)입니다.

누가 함허정을 다녀갔을까요.

셀 수 없이 많은 시인 묵객들이 함허정을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함허정과 관련된 시와 유산록(기행문)이 많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집 번역 작업이 더디고, 번역된 내용들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가 구축되어 있지 않아, 함허정 관련해서 지금까지 발굴된 시와 산문의 양은 너무 미약합니다.

다행히 학봉 김성일 선생과 고봉 기대승 선생을 비롯한 걸출한 문사들이 몇몇 시문이 있어, 그것을 통해서 오리지널 함허정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학봉 김성일과, 고봉 기대승의 시를 소개합니다.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임진왜란 발발하기 전에 황윤길 부사와 함께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 인물입니다. 그런데 다녀온 다음 두 사람의 보고가 정반대로 엇갈립니다. 황윤길은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으니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성일은 일본이 침략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고 보고합니다. 임진왜란과 관련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결국 임진왜란은 일어났고 붕당에 눈이 먼 김성일이 일부러 반대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드러나, 그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끝났다고 끝난게 아닙니다.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김성일은 대체로 올곶은 선비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때는 초무사로 임명받아 전장으로 달려가 의병들과 함께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학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579년경, 나주목사로 재임했는데 그때 함허정을 다녀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심광형 선생이 타계하신 이후라서 두 분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함허정에 붙여

산은 오흥처럼 푸르르며

강은 낙월처럼 흐르는구나

만리 펼쳐진 경관에 마음이 아득 하누나.

涵虛亭題

山積吳興翠

江通駱越潮

萬里興迢迢

여기서 낙월과 오흥은 당나리 시에 등장하는 중국 지명입니다. 함허정을 노래하는데 왜 느닷없는 중국 지명이 등장하는지 지금 시각으로는 공감되지 않지만, 조선 성리학자들은 우리나라를 중국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시에 이런 인용구를 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영남학파의 수장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의 양대 산맥입니다. 고봉과 퇴계가 수 백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이기론을 갖고 열띤 토론을 벌인 일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고봉 기대승과 제호정 심광형, 두 분 모두 하서 김인후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따라서 두 분 끼리의 교류도 활발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기대승 선생이 안문보라는 지인에게 함허정 경치를 자랑하는 형식으로 지은 시입니다.

안문보에게 주다

우린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순자강에 떠 있는 저 달이

그대의 술잔에도 담겨 있을 거고

내 마음도 어루만져 주네요.

정자에서 바라보는 그윽한 풍경을

홀로 누리기가 너무나 아쉬운데

산 너머로 드리워진 안개가

석양빛으로 물드네요.

贈安文寶

遙 知鶉子江頭月

照却君杯又照 吾

高樓延 賞增幽致

山外烟光帶夕曛

군지촌정사 사랑채인 망서재(望瑞齋)는 “서석산(瑞石山)을 전망하는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 서석산은 무등산의 옛 이름입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망서제 앞 전망이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어 가깝게는 옥과 설산, 멀리는 무등산이 한눈에 조망되었을 것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제월당 고택과 망서제는 19세기 이후에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요. 군지촌정사와 함허정을 세운 심광형 선생의 정신세계와 함께 함허정에 담긴 여러 의미를 알고 보면 완전 달리 보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풍성함을 안겨주는 명당이라고 하니, 한 번쯤 가서 마음을 차분하게 내려놓고 머물다 오면 새해에는 만사가 형통할 것입니다. 겨울여행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보석같은 인문학 여행지 곡성 함허정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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