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백제의 마지막 왕도 익산 왕궁을 수호하라! 사적 왕궁사찰 제석사지
백제 무왕이
왕궁을 수호하기 위해 지은 절
멀리 사적 왕궁리 유적지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은 왕궁면 왕궁리 궁평 마을 제석사지입니다.
왕궁리 오층 석탑과는 직선거리로 약 1.3km 떨어졌는데요, 지금이야 왕궁리 오층 석탑까지 가는 길에 마을이 있어 제석사지에서 조망은 어렵지만, 백제시대 때에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웠겠습니다.
궁평 마을 뒤쪽으로 익산의 진산 미륵산과 용화산이 보이고 두 산의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하천을 이뤄 굽이굽이 만경강으로 흐르며 하천 주변 들녘은 황금물결로 넘실대는데요, 원래 제석면 제석 궁뜰이었지만, 일제 강점기 마을 이름이 왕궁면 ‘궁평(宮坪)’으로 바뀌었습니다.
'궁평'이란 이름은 ‘궁뜰’, ‘궁터’와 같은 뜻으로 마을 이름이 궁평 마을인 것에서 보듯 제석사지는 백제의 마지막 왕궁 사찰 제석사(帝釋寺)였습니다.
제석사는 백제 무왕이 왕궁리에 왕궁을 세우면서 왕궁 사찰로 지은 사찰입니다.
발굴된 규모로 보면 미륵사지만큼 엄청난 규모는 아니지만,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수호신 제석천(帝釋天)에서 이름을 따온 것에서 보듯 왕궁을 궁뜰로 옮기며 왕궁을 수호하기 위해 지은 절이어서 미륵사지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동서 길이가 약 100m이고 남북 길이가 약 170m에 이를 정도로 면적은 넓은데요, 법당 건물이 들어선 채로 있었다면 그리 커 보이지도 않습니다.
도로에서 마을 안길로 50m 정도 들어가면 제석사지가 시작되는데요, 지형으로 보면 건물들이 들어선 곳까지 모두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을을 지나자마자 절터가 시작되는데요, 맨 앞에 있는 터가 목탑 터입니다.
제적사지는 1탑 1금당 가람 배치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라고 하는데요, 대부분의 사찰이 여러 전각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하면 가람배치는 오직 왕궁 사찰로 최소화한 듯합니다.
목탑 터에는 사리공이 뚫린 심초석이 있는데요, 1993년 말에서 1994년 초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2007년부터 2012년까지 3차례에 걸쳐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중문과 목탑지, 금당지, 강당지, 회랑지 등을 확인했지만, 석재 부재 외 출토유물은 수막새와 암막새, 인각와, 명문와, 평기와 조각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제유적에서 처음으로 암막새가 출토되었고 1942년 일제강점기 제석사지에서 출토된 제석사명문기와(국립공주박물관 소장)와 관세음응험기(일본 청련원 소장 중국 육조시대 기록문헌) 기록에서 제석정사가 거론된 걸로 보아 현재의 제석사지는 무왕이 왕궁을 세우면서 함께 왕궁 사찰로 제석사를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 무왕이 익산에 천도해 새로운 정사를 지었는데, 무왕 40년(639년) 벼락으로 불당, 칠급부도, 낭방 등 이 모두 전소되었다고 합니다. 탑 아래 심초석에 넣어두었던 종종칠보와 불사리를 넣은 수정병, 동판으로 만든 금강반야경을 목칠함에 넣어두었는데, 초석을 빼보니 소실을 면해 다시 사찰을 지어 안치했다고 합니다.
현재 초석은 두 동강 났던 것을 결합한 상태인데요, 초석 안에 손을 넣어보니 1400여 년 전 뜨거운 화재에서도 살아남은 유물들의 안위가 궁금해졌습니다. 일제강점기 후반 제석사명문 기와가 출토돼 당시 공주박물관에 기탁되었다는 기록에서 보듯 오래전 폐사되었고 유물들의 행방을 알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목탑 터 뒤로 약 17m 떨어진 금당 터입니다.
길이 약 30m에 너비 약 21m로 이중 기단으로 이루어졌는데요, 발굴조사 후 수습한 석재들은 모두 한데 모아 따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금당 터에 나서 18m 뒤쪽으로 승방 터입니다.
목탑부터 금당, 승방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맨 뒤쪽인데요, 길이 65.5m 너비 13.1m 기단으로 볼 때 상당히 큰 승방으로 보입니다. 승방 터 양쪽 모서리에서 목탑 터가 있는 곳까지 좌우로 긴 회랑 터가 있지만, 집들이 들어서 있어 추가 발굴을 어려웠나 봅니다.
제석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나온 석재는 회랑으로 추정되는 부분에 보관했습니다.
석재는 목재와 달리 불에 타지 않기에 천년 이천년이 지나도 남아있는데요, 불에 그을린 듯 시커먼 흔적도 보여 벼락으로 불에 탔다는 제석사의 모습도 그려지는데요, 발굴조사 전 상태 그대로 그 위치에 석재들이 있다면 어떨까도 싶습니다.
제석사지 입구에 종합정비사업 안내도가 있습니다.
정비 조감도를 보니 제석사지 정비는 모두 마친 상태인데요, 기록을 살펴보니 2014년 준공했습니다.
2015년부터 사적지 토지매입을 시작으로 2022년까지 연차적으로 제석사지와 주변에 대한 정비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지만, 현재 제석사지에는 큰 변화는 없는 듯 합니다.
보시다시피 길이 220m에 폭이 약 100m에 이르는 넓은 제석사지에는 목탑 터 주변에 소나무 식재가 전부인 상황입니다.
또한, 뒤에 알게 되었지만, 제석사지가 있는 궁평 마을 경로당 안길로 약 600m를 더 올라가면 제석사가 불타버렸을 당시 폐기물을 모아놓은 폐기장이 있는데 그와 관련된 정보는 제석사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위 유물들은 제석사지 폐기장에서 출토한 소조 악귀상과 소조 승려상, 소조 천부상으로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 중인데요, 최소한 제적사지 정비사업 안내도에도 폐기장 위치도 함께 표시했더라면 제석사지를 찾은 사람들이 제석사지 폐기장까지 찾아볼 것입니다.
현재 제석사지 한가운데 민가와 밭이 있고 관통한 도로 끝과 회랑 주변, 중문지 앞에도 민가가 여러 채 있는데요, 사적으로 지정된 면적은 24,218㎡로 7300여 평으로 사유지를 매입하지 않는 한 추가 발굴은 어려울 것으로 보여 왕궁리 유적과 연계한 역사관광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활용도가 필요해 보입니다.
한때 백제 익산 왕도의 왕궁 사찰로 화려했던 제석사는 백제가 멸망한 뒤 통일신라시대 정역사로 불렸고 고려 시대 다시 제석사가 되었다가 이후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미륵사지가 639년 창건되었고 제석사지는 639년 벼락으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으니 어쩌면 무왕의 익산 백제 시절 미륵사보다 더 빨리 지은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왕궁리 유적지와 제석사지 그리고 제석사지 페기장까지 연계한 프로그램으로 익산을 찾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석사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247-1
■제석사지 폐기장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30-14
글, 사진 = 심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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