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 터

제75주년 제주 4·3희생자 추념식에 즈음하여,

유독 바람이 세찬 날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를 찾았습니다.

제주 4·3사건 중 예비검속 섯알오름 학살 터와 이로 인해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을 모신 백조일손 묘역까지 기억하기조차 힘든 제주 4·3의 역사를 바로 알고 이해하기 위해 고혜자 4· 3 유적지 해설사님과 동행하였답니다.

섯알오름 희생자 신위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재단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65년 만에 명예 회복을 하신 영령들의 명복을 기원해 봅니다.

사건 개요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예비검속한 344명 중 계엄사령부에 송치된 252명을 동년 7월 16일과 8월 20일 법적 절차 없이 모슬포 주둔군에 의해 집단학살 암매장 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원회 희생자 결정 : 진화위는 기본 제23조 동법시행령 제7조 및 위원회 규칙 13조에 근거 2005년 12월 1일 ~ 2006년 11월 30일까지 진실규명 신청을 접수하고 2006년 4월 25일 ~ 2007년 2월 20일까지 조사 결과 낙동강 전선이 위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 피난계획 및 제주도를 대한민국 정부의 마지막 보루로 삼으려는 이유에서 양민을 집단학살한 것으로 인정, 2007년 11월 13일 218명에 대해여 희생자로 결정함.

진화위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국군이 민간인을 법적 절차 없이 집단 학살한 사건을 중대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군과 경찰의 통수권자인 대통령에 있고 최종적으로 국가에 있으므로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하며 그에 상응하는 실질적 배상을 권고하였음.

국가상대 손해배상청구소송 : {원고 : 섯알오름 희생자 유족, 피고 : 대한민국(법률상 대표자 : 법무부장관)] 예비검속 섯알오름 양민 집단 학살이 공권력에 의한 희생으로 결정됨에 따라 2010년 8월 11일 희생자 252명 중 96명(38%)의 유족은 소송대리인을 법무법인 덕수로 정하고 동년 11월 2일 서울지방법원에 소장을 제출하여 4차의 변론을 거처 2012년 5월 8일 원고 1심 승소하였음.

그러나 피고의 항소에 따라 서울고등법원은{사건 2012 나 50027 손해배상(기)}5차의 심리와 변론 끝에 2014년 9월 18일 변론을 종결하고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항변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 하여 피고 패소 처분하자 {재판장 이승영 판사 우관재 김영식) 피고는 대법원에 또다시 상소하였음. {사건 2015다 209750 손해배상(기)}이에 대해 대법원은 원심 판결이 위반이 없다고 판단하여 2015년 6월 24일 심리 불속행 기각 처리하여 {재판장 대법관 이상훈 김창석 주심 대법관 주희대 박상옥) 국가는 희생자 1인당 8,000만 원 배우자 4,000만 원 부모 자식 800만 원 형제자매 400만 원을 배상하도록 판시하므로 원고는 승소하였음.

이에 우리 유족들은 65년 만에 염원하던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으므로 그 깊은 뜻을 만세에 기리고자 이 碑를 세웁니다.

英靈들이 시어!

恨 맺힌 65년!

이제 긴 여정이 끝입니다.

영령 앞에 엎드려 명복을 빕니다.

백조일손 유족회

1950년 당시 예비검속 학살 사건 개요와 유족들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사건 발생 65년 만인 2015년에 명예 회복까지 내용을 담은 표석입니다.

증거인멸의 장소

기는 대학살을 강행한 후 증거인멸을 위해 유품을 불태웠던 곳이다.

예비검속 구금 장소는 협소했다.

"넓은 장소로 간다"고 유인하여 희생자들을 생활 소지품들을 모두 트럭에 실었다.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새벽 트럭에 실려가며 고향마을 벗어나 이곳 길을 향했을 때, 그제야 자신들의 죽음을 예측했었는지 신었던 검정 고무신 등을 벗어던지며 가는 길을 가족에게 알리려 했었다.

길 위에 검은 고무신들을 따라 유족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곳에서 담요, 배게, 옷가지, 허리띠 쌀, 부식 등 희생자들의 소지품이 모두 불에 타고 있었다.

그날의 역사적 사실을 자각함은 희생자의 원혼을 추모하는 일로서 당시에 남편 찾아 달려와 현장을 목격했던 이상숙(1925년생) 여사가 일금 4,500만 원을 지원하여 재현된 시설물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고향마을을 벗어나 한 살 터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예측한 희생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품들을 던지며 가족들에게 알리려 했다는데요,

추모비 재단에 검정 고무신이 유독 많이 올려져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설사님이 설명으로 당시 상황이 얼마나 다급하고 끔찍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답니다.

희생자와 유족들의 마음을 담은 김경훈 시인의 '섯알 오름 길' 이 추모비에 새겨져,

이곳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 터를 찾아온 이들에게 제주 4·3의 아픔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섯알 오름길

김경훈 글

트럭에 실려 가는 길

살아 다시 못 오네

살붙이 피붙이 뼈붙이 고향마을은

돌아보면 볼수록 더 멀어지고

죽어 멸치젓 담듯 담가져

살아 다시 못 가네

이정표 되어 길 따라 흩어진 고무신들

전설처럼 사연(死緣) 전하네

오늘은 칠석날

갈라진 반도 물 막은 섬 귀퉁이 섯알오름

하늘과 땅, 저승과 이승 다리 놓아

미리내 길 위로 산 자 죽은 자 만나네

녹은 살 식은 피 흩어진 뼈

온전히 새 숨결로 살아 다시 만나네

2007년 12월 31일

제주특별자치도

유해 발굴 시 드러난 일본군 탄약고 콘크리트 잔해물

섯알오름 학살 터

섯알오름은 한국전쟁 발발 후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의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장소이다.

이곳에서는 1950년 8월 20일 새벽 2시에 한림 어업 창고 및 무릉지서에 구금됐던 63명, 새벽 5시에는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에 구금되었던 132명이 해병대 제3대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유족들은 시신 수습을 위해 당국에 계속 허가를 요청했으나 번번이 묵살당해 오다 사건 발생 6년 만인 1956년 3월, 한림지역 63명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수습되어 한림읍 '갯거리오름'의 '만벵디공동장지'에 묻혔다.

또 모슬포 지역 희생자 132명의 유해는 1956년 5월 시신 수습 허가를 받고 사계리 공동묘지 부지를 마련하여 안장할 수 있었다.

*예비검속 법이란 : 일제 치하인 1941년 5월 5일 제정한 조선 정치범을 탄압하던 구금령으로서 1945년 10월 9일 아놀드 美 군정장관의 이름으로 법령 제11호로 폐지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

1950년 8월 20일 새벽 두시에 63명의 한림읍민과, 동일 새벽 5시에는 대정읍민 132명이 해병대 제3대대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었던 현장에서 고혜자 해설사님이 설명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답니다

섯알오름에 조성된 추모路에서는 학살 터와 추모비를 조망하고, 추모路의 끝부분에 조성된 추모정에서 다시 한번 영령들의 명복과 유족들의 한과 아픔을 되새겨 봅니다.

백조일손 묘역

섯알오름 예비검속 학살 터에 이어 백조일손 묘역을 찾았습니다.

대정읍 소재 섯알오름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묘역으로 백조일손이란,

조상이 각기 다른 일백서른 두 자손이 한 날 한 시 한곳에서 죽어 하나의 뼈로 엉키어 한 자손으로 환생한 것을 말합니다.

올해로 85세를 맞이한 섯알오름 학살 터 산증인 양신하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양신하 어르신은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섯알오름에서 벌어진 예비검속자 집단학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그때가 음력으로 6월 보름날이었는데 형님이랑 나는 집줄을 매어둔 후 조카들 데리고 바다에 갔는데 형수님이 '동네 사람들 향사에 모이는데 가서 얼굴 비쳐 버립서' 해서 형님이 향사로 간 거다.

그런데 향사에 간 사람들이 전부 무릉지서로 갔다고 하니까 우리 형님은 그냥 돌아왔으면 될 것을 너무 고지식해서 무릉지서까지 간 것이다.

결국 형님은 모슬포 절간 창고에 구금이 됐다가 1950년 8월 20일 섯알오름에서 학살됐다.

당시 섯알오름에서 195명이 무자비한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

유족들은 총살 현장으로 들어가 유해를 수습하려 했지만 군, 경 당국의 출입통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 6년 후인 1956년 3월 말 섯알오름 탄약고터가 군부대 확장공사로 붕괴돼 유해가 드러나자 유족들은 마침내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

형님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그 한을 가슴속으로 삭히고 있었다.'

그러다 1956년 5월 18일 고등학교 수업을 받고 있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유골이 수습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더니 백수십 명의 유족들이 물구덩이 속에서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자기 가족의 유골임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유골을 찾아갔지만 6년간이나 물속에 잠겨있던 유골들이었기에 어느 것이 형님의 유골인지 어떻게 알겠느냐, 결국 형수님에게 아무 유골이나 챙기라고 해서 두개골 하나와 수개의 유골을 받고 백조일손 묘역에 묻고 나왔다" 하시면서,

"이와 같은 일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며, 우리 후손들에게 정확한 역사를 알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여기서 백조일손 묘역 조성 경위를 살펴볼게요.

1954년 7석공동유족회 구성 및 묘지를 매입하여 1956년 5월 18일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132위를 이곳 묘역으로 안장하고 백조일손 및 백조일손지지 명명하였고, 이후 1959년 5월 8일 위령비를 건립하였습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경찰 지시에 의해 위령비를 파괴하고 23위를 강제 이장하였지만,

1993년 8월 20일 위령비 제막 및 민관합동 위령제를 봉행, 이후 묘역 축성공사 및 묘역 진입로 개설, 평화교육 체험 자료관 건립 등을 추진하였으며,

현재 백조일손 기념관 신축사업 등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백조일손 묘역 추모비에 새겨진 '이 빗돌 세운 뜻' 중 마음에 와닿는 글귀를 끝으로 마칩니다.

삼가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송악산 앞바다는 푸릅니다

산방산 끝에 닿을 절규하던 그 울음이

오늘은 메아리 되어 뼛속까지 스밉니다.

오손도손 모여 앉아

식은 밥 나눠먹던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며 끌려가던 그날도

하늘은 온통 오늘처럼 타더이다.

중략

죄지은 자 하나 없고 죄 없는 자만 묻혀

백서른 둘 뼈가 엉켜 한 자손이 돼옵니다.

이 설움

시대를 탓하며 옷소매를 적십니다

억울한 죽음에는 꽃이 핀다 하더이다.

중략

진실을 빗돌에 새겨 참역사를 세웁니다.

후략

백조일손 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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