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해평 쌍암고택 북애고택 고즈넉한 고택 방문기"

2023 제 6기 구미시 SNS 서포터즈 이지원

며칠 전 산책길에 홍매화 몇 송이가 소담스럽게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더라고요.

봄의 전령사들이 하나 둘 깨어나는 걸 보니 길게만 느껴졌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나 봅니다.

중요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이

구미 해평에 있다고 해서 산책하기 좋은 날 다녀왔습니다.

마을 어귀에는 300년이 훌쩍 넘은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고

수줍은 듯 그려진 아기자기한 벽화가 마을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미소를 선사합니다.

봄이 짙어지고 방문했더라면 300년 느티나무에 잎이 파릇 파릇 달린 모습이 장관이 아니었을까

이른 방문에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을 회관 앞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 계시는 듯 어르신용 유모차가 많이 서 있더라고요.

동네 어르신들의 구수한 이야기 소리와 웃는 소리가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북애고택과 쌍암고택은 서로 마주 보고 위치하고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어요.

"북애고택"

동네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위치한 북애고택은 조선시대의 양반가옥으로 영정조 시대의 실학자인

최광익이 1786년 정조 12년에 지은 둘째 아들의 살림집이라고 합니다.

1983년도에 경북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쌍암고택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애고택으로 불리게 됩니다.

북애고택은 사랑채와 ㄷ자 모양의 안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앞면 7칸, 옆면 1칸의 중문간채로 지어져 있습니다.

안채는 H자형으로 대청을 기준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좌우 날개가

돌출되어 있는 구조가 변형된 것이라고 합니다.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목련 나무에 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는데 하얀 목련이 피면 고즈넉한 고택이

화사하게 변할 것을 생각하니 목련 꽃만 한 함박웃음이 지어지기도 하네요.

넓은 마당과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는 집을 보니 300년 가까이 지나온 세월 속에서도

건재함을 과시하는 모습에 놀랍기만 합니다.

안마당과 중문 간 쪽으로 벽체를 세워 안마당이 공개되지 않도록 설계를 한 부분이 돋보이는 북애고택은

사당도 함께 지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현존하지 않아 안타까웠어요.

그래도 이곳은 화은공의 후손 종친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나마 잘 관리되고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정갈한 느낌과 잘 정돈되어 보이는 고택에 하룻밤 묶으며 운치 있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쌍암고택"

북애고택의 왼편에는 바로 쌍암고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쌍암고택과 북애고택은 형제의 집이었는데

쌍암고택에 형이 살고 북애고택에 동생이 살았지만 후에 서로 집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쌍암고택은 1755년 영조 31년 최광익이 살았던 곳으로 중요 민속 문화재 제105호인 조선시대의 가옥입니다.

앞에서부터 대문채,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사당을 차례로 배치하였고 사랑채만 남향이고

다른 곳은 모두 동향으로 지어졌다고 해요.

원래 집 앞에 있던 바위 2개로 인해 쌍암고택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는데 옆에 새로운 집이 지어지며

바위 하나는 없어지고 다른 하나는 주초석이 되어 있습니다.

쌍암고택을 지키고 있는 분은 최열님으로 1986년에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와 고택을 지키고 있으며

현재는 아드님과 함께 고택의 대를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쌍암고택 어르신은 흔쾌히 집을 소개해 주신다고 하시는데

제가 방문한 날은 문이 잠겨져 있어 조금 안타까웠습니다.

이 고택은 문화재라기보다는 일반 살림집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어요. 농사지으시던 농기구와 마당에 주차된 트럭

살림에 필요한 집 기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모습이 우리네 시골집 풍경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화재라는 이유로 함부로 고칠 수도 현대사회의 편리함도 맛볼 수 없지만 묵묵히 조상들의 뜻을 받들어 지키고 가꾸며 후세에 건재한 모습으로 물려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고스란히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담 아래 한편에는 농민항쟁에 관한 안내판이 있는데 쌍암고택은 1894년 농민항쟁 시

양반 가인 고택의 식구들이 합천으로 피신을 가있던 틈을 타 일본군이 병참기지로 사용했다고 해요.

집 안 내부에는 "갑오동학농민집결지"라 적힌 표지석이 있는데

당시 양반가였던 쌍암고택과 농민들 간의 대립적인 입장을 가진 관계였지만 근대사 역사의 아픔의

흔적을 남기는데 흔쾌히 허락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웅장했을 조선의 양반 가옥의 솟을 대문이 오늘날 평대문으로 바뀌어 있는 모습은 조금 안타까웠는데요.

문화재의 관리에 필요한 지원이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근처에 이렇게 조선 시대의 양반 고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답니다.

마을을 좀 더 구경 해보기로 했는데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이 있더라고요.

사도세자의 스승인 운엄 최광벽 선생의 사당과 최헌 선생의 문학비를 볼 수 있습니다.

사당에서 내려다보이는 해평 마을은 무척 평온해 보였습니다.

과거에 이 마을에는 많은 고택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쌍암고택 북애고택 두 채만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픈 역사를 거쳐오며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고 유실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남아있는 문화유산이라도

잘 보존해서 후세들에게 좋은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도록 있도록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시는 길

주소: 구미시 해평면 해평2길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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