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 전
부처님의 미소를 닮았던 오후의 화성 무봉산 만의사
화성시에는 천 년이 넘은 사찰이 두 곳 있습니다. 화산 용주사와 무봉산 만의사가 그곳들로 한 곳은 너무나 유명해 찾는 사람들이 많고, 다른 한 곳은 천년 절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편입니다.
어느 곳을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세상의 시끄러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만의사를 다녀왔습니다.
사찰로 가는 길은 최근에 도로포장 공사로 인해 다소 어지러운 편이지만 양보하며 지나간다면 교행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주차장 겸 약수터에 주차를 하고 보니 돌 거북 두 마리에서 약수가 콸콸 흐릅니다. 근처 주민들에게는 건강수인 물은 약수통에 물을 받아 갈 정도로 시원하고 맑은 맛이 일품입니다.
물도 마셨으니 이제 사찰로 들어가기 위해 일주문을 지나갑니다. 이곳 사찰의 일주문은 다른 사찰들과 다릅니다. 일주문의 생김새야 비슷하다지만 한글로 새긴 현판과 승천하듯 용트림하는 용 두 마리가 일주문 앞에 있는 모양새가 뭔가 비상합니다.
일주문뿐만 아니라 천왕문을 지나면서도 다른 곳과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수령 천여 년이 넘은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깎아 만든 제석천왕님과 미륵불의 화신인 포대화상이 사찰보다 먼저 방문자들을 맞이합니다. 두 분 모두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으로 누군가는 제석천왕님께 절을 하고, 누군가는 포대화상의 배와 돈주머니를 돌려 만지면서 소원을 빕니다. 포대화상이 앉아 있는 모습은 인상 좋은 아저씨가 ‘어서 와’라며 환영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여요.
대웅전으로 가는 길은 범종각을 지나갑니다. 범종각 앞에는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져 있어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봄이었다면 분홍색 꽃이 환해 볼 만했겠습니다.
무봉산 만의사는 용주사의 말사입니다.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어요. 역사는 오래되었다지만 지금의 전각들과 석탑, 석불 등은 현대에 와서 조성한 것으로 옛 맛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일주문 현판과 대웅전 기둥에 한자 일색인 다른 사찰과는 달리 한글로 정갈하게 쓰인 문구들이 있어 걸음을 멈추고 읽어 보게 됩니다.
‘우주는 한 가정, 중생은 한 가족,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는 문구 중에 마지막 문구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대웅전 옆으로 올려다보니 대형 석불이 보입니다. 어딘지 익숙한 불상의 모습에 기억을 더듬어 보니 충남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과 닮았습니다.
은진미륵의 그윽한 웃음보다 좀 더 진중한 얼굴의 미륵상을 보기 위해 올라가는 길은 초록의 등나무 터널이 반깁니다. 햇살이 뜨거웠는데 잠시나마 빛을 피할 수 있었고, 초여름이었다면 달큼한 등나무 향으로 취했겠어요.
미륵상이 바라보는 풍경이 궁금해 나란히 서보니 사찰의 전경이 펼쳐집니다.
만의사는 1600년 전 인도의 고승이 범종과 불경, 불사리 등을 가지고 이곳을 지나던 중 오색구름이 일어 땅을 살펴보니 어머니 태속과 같은 명당 중의 명당이라 절을 짓고 범종을 울렸다고 전합니다. 그 후 고려 문종 때 절 중창과 범종이 주조되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왕을 거치면서 규모가 커졌는데 지금의 만의사는 조선시대에 옮겨온 자리라고 합니다.
옮기기 전에는 1.8km 떨어진 신동에 있었는데 조선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의 초장지로 선택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금에 이르게 됩니다.
조선의 기본 사상이 숭유억불 정책이었다는 것이 이 과정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 대목이에요.
이 사찰의 가장 윗부분에 자리한 천불전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고 겉에서만 맴돕니다. 뜨거운 햇살에 사람들도 지쳤는지 찾아오는 사람들도 없어 천불전 앞에서 내려다보는 고요함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산 너머로 해가 넘어가기 위해 꼴딱거리는 보니 사찰에 외부인이 출입할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 것 같아요. 이제 집에 갈 시간입니다.
- #만의사
- #무봉산
- #천년사찰
- #화성
- #화성시
- #화성가볼만한곳
- #화성시사찰
- #용주사
- #용주사말사
- #무봉산만의사
- #화성무봉산
- #화성만의사
- #사찰
- #사찰여행
- #화성여행
- #일주문
- #천왕문
- #포대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