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독립운동가 조성환·이인영·이은영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한국광복군 창설을 주도한 조성환 선생과

구한말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해 의병장으로서 서울 진공작전을 펼친 이인영 선생은

여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역사적 발자취를 만날 수 있는 곳,

여주 보통리 고택과 이인영·이은영 생가를 찾아가본다.

두정아 사진 김성재

조성환 선생의 생가, 여주 보통리 고택

여주 보통리 고택은 여주의 독립운동가 조성환(1875~1962)과 춘천 의병 의병장인 이만응이 거주했던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2022년 개인 소유의 고택을 여주시가 매입 후 복원 및 보수를 거쳐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조성환 선생의 부친이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과 함께 매각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가민속문화재이자 경기도 민속문화유산(여주보통리해시계)인 여주 보통리 고택은 대신면 보통리에 대대로 살아온 창녕 조씨 하산군파의 가옥으로, 역사적·건축사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곳이다. 조선시대 중부 지방 민가의 특징적 공간 구성을 갖추었으며, 인근 지역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사대부 가의 격식을 갖췄다. 경기도에서 드문 폐쇄형 ‘ㅁ’자형 평면의 고택으로, 안채와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 등이 적절하게 배치돼 있다. 안채의 날개채에 곁달린 작은 사랑채와 큰 사랑채의 정면에 조성한 누마루는 이 고택만의 특징이다.

1999년 지붕 수리 공사 중에 발견된 상량문과 문중 기록 및 건축 기법을 통해 볼 때 조선시대인 1810년대에 건립한 건물로 추정되고 있으며 비록 행랑채는 없어졌지만, 격조 높은 집으로 평가받는다. 여주보통리해시계는 고택 사랑채 앞에 놓여 있는데, 받침석 측면에 시간을 표시하던 글씨와 눈금, 그림 등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경기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해시계 / 여주 보통리 고택의 안채 전경

전통문화 향유의 공간으로 거듭나

여주시는 여주 보통리 고택의 복원 수리 사업을 진행하면서 편의시설과 숙박체험이 가능하도록 정비했다. 임시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개최되는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여주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리는 전통문화 예술향유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외교 및 군사전문가로 활약한 조성환 선생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안창호 선생과 함께 신민회에서 활동했다. 이후 베이징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고 만주에서 서일, 김좌진 선생 등과 함께 대한군정부를 조직, 북로군정서를 창설해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을 거쳐, 1939년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중국 시안에 파견되어 한국광복군 창설의 주역이 됐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여주 보통리 고택

위치 여주 대신면 보통1길 98

2009년 이인영 생가 입구에 세워진 기념비. 뒤편에는 이인영 기념비 추진위원회(위원장 박근출)의 명단도 새겨져 있다

서울 진공작전 이끈 여주 출신 의병장

여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인영(1868~1909)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후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 이강년과 함께 복수를 결심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학식 높은 선비였던 이 선생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확산하던 중 일제에 항거해 13도 창의대 총대장으로서 의병을 총지휘했고 의병 500명을 모아 춘천과 양구 사이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성

과를 올렸다. 13도 창의대는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각 도의 의병들을 이끌고 서울 진공작전을 펼쳤다. 양주에서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공략할 계획으로 진격 도중 38회의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선생은 은거하던 중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42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정부는 1962년 국권 회복을 위해 희생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 이인영·이은영 형제의 생가

일제에 항거하며 의병운동을 전개했던 이인영 선생의 생가(여주시 향토유적 제17호)는 여주 북내면에 위치해 있다. 사랑채는 허물어지고 안채만 있는 상태로 목조 초가지붕 형태다. 부지 1,422㎡, 연면적 43.55㎡로, 19세기 후반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초가였던 것을 후손이 목조 지붕틀 위에 슬레이트 우진각지붕으로 개량해 사용했으나, 현재는 원형을 추정해 초가 형태로 복원을 완료한 상태다. 이인영 선생은 이곳에서 1868년에 태어났으며 후손들이 거주해오던 생가를 2020년 여주시가 매입해 근현대 문화재로 보존·관리하고 있다. 생가 입구에는 이인영 선생의 기념비가 설치돼 있다.

친형인 이인영 선생을 도와 13도 창의대에 참여하며 나라를 지킨 이은영 선생 또한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기와 강원 일대에서 항전을 이어갔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임병찬·이인순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독립의군부에 들어가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의병장 이인영 생가

위치 여주시 북내면 상교1길 119-16

국권회복을 위한 여주인들의 투쟁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여주에서도 1896년 북내면 출신 심상희를 대장으로 의병이 조직돼 활약을 펼쳤다. 여주민들은 의병에 적극 가담해 중요한 인적·물리적 기반이 됐고, 여주의병은 충청도까지 진출해 광주, 이천 등지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해 크게 기세를 올

렸다. 여주의병은 정미의병 항쟁기인 1907년에서 1909년까지 일본 목선을 습격하고 여주읍을 점령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뒀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항일의병운동이 전국 규모로 확대되던 시기에는 북내면 출신 이인영이 총대장으로 추대되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여주 곳곳에서도 동시다발적인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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