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 전
[블로그기자단]산책하며 역사 공부, 중장년층 몽촌토성 탐방
글·사진 : 블로그 기자단 추미양
※방역수칙을 모두 지킨 후 취재하였습니다.
올림픽공원은 산책하기 아주 좋은 곳입니다. 산책 코스가 여럿 있는데 몽촌토성 산책로가 가장 인기가 있죠. 구불구불하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 지루하지 않고 주변 경관도 조망하기 좋으니까요. 저는 반려견과 몽촌토성 산책로를 자주 걷는데, 발굴조사 현장을 지날 때마다 백제 시대의 몽촌토성 모습이 궁금하더군요. 백제의 왕성이 있던 곳인데, 복원된 건물이나 성문이 없으니 당시 모습이 상상이 안 됐어요. 돌을 쌓아 만든 성곽은 다른 지역에서 많이 보았는데 흙으로 만든 토성(土城)이라니? 게다가 성안에 궁궐이 정말 있었을까요?
몽촌토성에 대한 궁금증이 쏟아지던 중 한성백제박물관 입구에 걸린 현수막을 보게 됐어요. 중장년층(40세 이상)을 대상으로 백제 왕도가 있었던 몽촌토성을 탐방하는 교육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네요. 6월 8일까지 매주 목요일에 하는데 무료!!! 눈이 번쩍 떠졌어요. 건강을 다지는 산책을 하면서 백제의 역사와 문화 공부도 함께 한다니, 놓칠 수 없지요. 주말에 하는 문화유산 탐방이 계속 있었지만, 초등학생을 포함한 가족만 신청할 수 있어 아쉬웠는데 참 반가웠어요.
접수는 전화(02-2152-5852)로도 가능하지만, 저는 ‘서울특별시공공서비스예약(https://yeyak.seoul.go.kr/web/main.do)’ 사이트에 접속해 온라인으로 했어요. 모집인원은 15명인데 6명 이상이면 탐방을 진행한다네요.
한성백제박물관에 집합
탐방 하루 전날, 한성백제박물관 교육동 한성백제홀(강당) 앞에 13시 50분까지 오라는 문자를 받았어요. 한성백제박물관은 9호선 한성백제역 2번 출구에서 남 2문 방향으로 도보 5분 거리에 있습니다. 탐방 당일 도착하니 담당자가 친절하게 출석을 확인하고 이어폰이 달린 수신기, 탐방설명서와 볼펜, 기념품, 우비를 나눠 주셨어요. 기념품은 둥근 양면 거울인데 한쪽에는 돋보기 기능이 있는 거울이 부착돼 있네요. 중장년층을 배려한 맞춤형 선물입니다. ^^!
오리엔테이션과 제2 전시실 관람
탐방에 앞서 이윤진 교육 강사가 교육 일정, 탐방 코스, 소요 시간을 알려주시네요. 제2 전시실과 로비 관람 20분을 한 후 몽촌토성 탐방을 90분 정도 한답니다.
우선, 백제와 몽촌토성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제2 전시실로 갔어요. 입구의 백제 연표를 보니 678년(BC18~660) 동안 31명의 왕이 있었네요. 강사님이 제시한 간단한 퀴즈를 풀면서 백제의 건국, 성장, 천고, 멸망 과정을 알아보았는데, 잠시 학창 시절 한국사 수업 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 위례성에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BC 18) ○ 평양성을 차지한 백제 최전성기의 근초고왕(369) ○ 고구려에 의해 한성을 빼앗긴 개로왕(475) ○ 도읍을 웅진성(공주)으로 옮긴 문주왕(475) ○ 다시 도읍을 사비성(부여)로 옮긴 성왕(538) ○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항복한 의자왕(660) |
전시실 안에는 한성(漢城) 풍경을 400분의 1로 축소한 모형이 넓게 자리하고 있네요. 북쪽에는 ‘풍납동 토성’ 남쪽에는 ‘몽촌토성’이 있는데, 풍납동 토성만 있었을 때는 ‘위례성(慰禮城)’으로 부르다가, 추후 몽촌토성이 만들어지면서 둘을 합쳐 ‘한성’이라고 불렀답니다. 그 당시 풍납동 토성의 이름은 북성(北城), 몽촌토성의 이름은 남성(南城)이었다고 합니다.
풍납동 토성은 한강 바로 옆 평지에 배 모양을 하고 있고, 몽촌토성은 남한산에서 뻗어 내린 야트막한 자연 언덕을 이용하여 마름모꼴에 가까운 불규칙한 모양을 하고 있네요. 몽촌토성을 만든 시기는 4세기 중후반으로 알려져 있고 성벽 둘레는 약 2.4km라고 합니다.
로비의 풍납동 토성 전사벽(傳寫壁) 관람
백제 사람들은 어떻게 몽촌토성을 쌓았을까요? 로비에 있는 풍납동 토성 성벽을 자른 단면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네요. 성벽은 나무틀 안에 흙을 붓고 다져 올리는 판축법(版築法)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돌이 아닌 흙으로 쌓아 올렸다니, 문득 지리적 상상력이 발동하네요. “한강과 성내천이 범람하면서 쌓아놓은 진흙과 모래를 사용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요. 한편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깔고 흙을 부어 다지는 ‘부엽법’ 기술도 사용했는데, 이는 지진이 났을 때 완충작용을 해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했답니다.
몽촌토성 탐방
한성백제박물관을 나와 본격적인 몽촌토성 탐방을 시작합니다. 백제학연구소 앞 가파른 계단은 남쪽 성벽에 해당하는데,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 그림이 계단에 그려져 있네요. 한성백제박물관 로고에도 들어있지요.
토성 위로 올라가 반시계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살펴보면 좌우 성벽의 경사가 큰 대조를 이룹니다. 바깥쪽 성벽은 급경사를 이뤄 외적이 쉽게 성벽을 오르지 못하도록 하고, 안쪽 성벽은 완경사를 이뤄 아군이 쉽게 올라갈 수 있고 사람들도 걷기 좋습니다. 바깥쪽 성벽은 발굴조사를 위해 청색 비닐로 덮여 있네요.
‘남서토단’에 다다르니 멀리까지 조망이 됩니다. 토단(土壇)은 성벽 일부가 조금 더 높이 솟아있는 곳으로 ‘망대지’라고도 부릅니다. 몽촌토성 성벽에는 토단이 4곳 정도 있었고, 망루를 만들어 사방을 감시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방이동, 석촌동, 가락동이 잘 보이네요.
서벽(西壁)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우측으로 풀숲이 있고 좌측으로는 ‘몽촌호’가 내려다보입니다. 몽촌호는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호수처럼 변했지만, 백제 때에는 성내천의 물이 들어와 성을 보호하는 자연 해자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해자(垓子)는 적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바깥 주위를 둘러서 판 못을 의미합니다.
1980년대 발굴조사를 할 때 우측 숲에서 지상건물지(地上建物地)가 확인됐는데요, 몽촌토성 안 궁궐터 위치로 추정한답니다. 지금은 운동 기구가 설치된 공간으로 변했네요.
이제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릅니다. 해돋이 명소로 알려진 ‘망월봉’은 ‘서북토단’이 있던 곳입니다. 표고 44.8m인 높은 평탄지인데 지금은 큰 나무 아래 벤치가 있어 산책하는 분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죠.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이곳에서 약 700m 떨어진 풍납동 토성 성벽이 한눈에 보였다고 하는데요, 한성백제의 왕은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을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한답니다.
서북토단에 서면 고층 건물이 시야를 일부 방해합니다. 전에는 한강 건너편의 남산, 행주산성, 아차산이 훤하게 잘 보였고 동쪽의 남한산도 시야에 잘 들어왔었죠. 아차산은 한성 도읍기의 마지막 왕인 개로왕이 죽임을 당한 안타까운 곳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한지 7일 만에 북성을 빼앗자 남성에 있던 개로왕이 서쪽으로 도망가다가 잡혔고, 아차산으로 끌려와 죽었다고 합니다. 개로왕이 죽자 아우인 문주왕이 도읍을 웅진성(공주)으로 옮겼고, 다시 성왕이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했습니다. 31명의 백제왕 중 21명이 한성에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서쪽 토단을 지나 북쪽 성벽을 따라 내려가면, 좌측에 성내천이 흐르고 우측에 ‘나홀로나무’와 500여 년을 견딘 은행나무가 눈에 띕니다. 성내천은 현재 비교적 반듯하게 흐르지만, 예전에는 제법 넓은 범위에 걸쳐 구불구불 흐르면서 몽촌토성의 해자 역할을 했습니다. 나홀로나무는 올림픽공원 9경 중 6경으로 초지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나무들 너머로 발굴조사 현장이 보이네요.
발굴조사 현장은 ‘북문지’ 안쪽에 있습니다. 땅속 문화재는 오래된 것이 아래에, 최근의 것이 위에 쌓여 있는데, 고고학에서는 이것을 ‘문화층’이라고 부릅니다. 표면의 흙을 제거하니 1980년대 집터 아래에서 조선 시대 자기가 포함된 층, 통일신라시대 30여 기의 집들과 우물,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층이 순서대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양으로 보면 한성백제 유물이 가장 많고, 주거지와 다양한 성격의 구덩이도 발견됐습니다. 현재 보호시설을 씌운 곳에서 고구려 때 사용한 초대형 집수지(集水地)을 조사하고 있는데, 가로 14m, 세로 14m 크기랍니다.
지금은 몽촌토성 안에 사람이 살지 않지만, 88서울올림픽 전에는 100여 가구 이상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올림픽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 주민들은 강동구 성내동과 주변 지역으로 이주했고요.
발굴조사 현장 바로 옆에 북문지가 있는데, 높이가 매우 낮습니다. 1,500여 년 동안 흙이 4m 정도 쌓였다고 하네요. 몽촌토성에는 성문이 남, 북, 동 세 곳에 있고 서쪽에는 성문이 없었습니다. 서쪽 성벽은 워낙 가파르고 높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지막한 북문지를 지나 성 밖으로 나와 동문지 쪽으로 가면, 우측으로 목책(木柵)이 보입니다. 목책은 땅에 구멍을 파고 큰 나무를 박아 세운 것으로 성곽과 더불어 중요한 방어시설이라고 합니다.
‘동문지’를 거쳐 토성 안으로 들어가 동쪽 성벽을 따라 조금 걸으면 ‘백제집자리전시관’ 앞에 성벽이 끊어진 지점이 있습니다. 이곳은 비밀문, 즉 암문(暗門)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성문을 잠그기 때문에 암문을 통해 전쟁 중 필요한 물자나 사람이 들락거렸죠. 지금은 돌이 깔린 좁은 길이 그 존재를 암시하고 있네요.
백제집자리전시관으로 들어가 보니, 1988년 조사에서 드러난 집자리와 저장구덩이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네요. 백제인은 움집에서 살았는데, 규모가 큰 집 바닥의 평면 형태는 6각형이거나 5각형입니다. 이곳의 움집에서 무기류가 출토되어 군사들의 숙소였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몽촌토성의 복원모형도 작게 만들어져 있어, 탐방한 곳의 기억을 더듬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제집자리전시관을 끝으로 설문지를 작성한 뒤 몽촌토성 탐방이 마무리됐습니다. 비가 그친 오후라 공기도 산듯하고 나뭇잎도 연두연두 하는 토성 탐방길! 그동안 걷기에만 집중했는데 교육 강사님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니 토성 산책로가 달리 보입니다. 사적 제297호로 지정된 문화재이고 백제 왕조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도성.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한성 도읍기의 백제 도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풍납동 토성도 탐방해야 하는데, 앞으로 풍납동 토성 탐방 프로그램도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탐방 후 참여자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서영수(70), 석순자(66) 부부는 잠실에 거주하는 딸이 정보를 알려주고 접수까지 해주어 탐방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지인과 함께 참여한 분은 “강사님이 저희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주고 질문에도 명쾌하게 답해주어 재미있고 유익했어요”라며 만족을 표시하시네요.
서울시는 백제유적인 풍납동 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 이번 몽촌토성 탐방은 한성백제 유적지와 유물을 훼손하지 않고 잘 지켜내야겠다는 사명을 갖게 한 의미 있는 교육프로그램이었습니다.
※ 본 기사는 블로그 기자단이 작성한 글로, 송파구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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