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항일결사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단체는 대한광복회였다. 이 단체는 군대식 조직으로 박상진이 총사령, 김좌진이 부사령이었으며 각 도를 비롯하여 만주에도 지부를 설치하였다."

- 고등학교 국사(하, 1996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빠질 수 없는 단체로 대한광복회가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청산리 대첩을 이끈 김좌진 장군이 부사령관으로 있던 항일 단체였습니다.

부사령관은 알아도 총사령관인 박상진 의사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익숙하지 못했데요. 일제의 무단 통치로 독립운동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1910년대, 국내 최대 항일 무장 투장 단체인 대한광복회를 설립하고 총사령관을 맡은 박상진 의사가 태어난 곳이 울산임을 아시는지요?

울산 북구 송정동에 위치한 '박상진 의사' 생가

박상진 의사(1884~1921)는 당시 경상도 울산도호부 농소면 지당리(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 지당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집안에서 한학을 배우다 1902년 당시 19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왕산 허위(許爲)에게서 정치와 병학을 배웁니다. 이후 스승의 권유로 당시 대한제국 최초의 민족 사학인 '양정의숙' 법률경제과에 입학하여 학문을 이어갑니다.

생가 내부에 위치한 박상진 의사 전시관에서는 박상진 의사 일대기를 살필 수 있다

전시관 실내 모습

1909년에는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비밀 결사 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합니다. 1910년에는 판사 등용 시험에 합격하여 평양지원에 발령이 나는데요. 이때 박상진 의사는 부임을 거절하고 항일 운동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력에서 보시다시피 판사 출신의 독립운동가인데요.

당시 고위 엘리트 출신이 성공 가도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거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무척이나 낯선 장면인 것입니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친일로 변절한 인물들이 있음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박상진의 스승 왕산 허위- 서대문 형무소 제1호 사형수이기도 하다

이처럼 박상진 의사가 보장된 출세의 길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데는 스승인 왕산 허위(1854~1908) 선생의 영향을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허위는 전형적인 유학자로 오늘날의 대법원장서리에 오른 인물입니다.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 해산과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발하여 일어난 정미의병때 의병들을 규합하여 일본군에 맞서지요.

하지만 이듬해인 1908년에 체포,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게 됩니다. (서대문 형무소의 첫 번째 사형수가 허위이다). 스승의 사망 이후 박상진 의사의 삶을 보면 이런 스승의 삶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대한광복회는 의병 조직과 계몽 조직의 연합체이다

한일강제합병 이후 박상진 의사는 국내를 떠나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투쟁 장소를 찾아갑니다.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라든지 석주 이상룡으로 대표되는 안동 유림이 독립 전쟁을 위해 만든 '백서농장' 등을 둘러보면서 독립 투쟁의 방향을 정하게 되지요.

국내로 돌아온 박상진 의사는 격동하는 중국 대륙과 급변하는 국제 정세, 만주의 독립 기지 사정 등을 국내 비밀 조직단에게 설명하여 하나의 광복회를 만듭니다. 당시 독립운동 방향은 먼저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와 전면적인 무장 항쟁을 해야 한다는 의병 투쟁론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요.

1915년 계몽주의 계열과 의병투쟁 계열을 총망라한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결사 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인 겁니다.

대한광복회 국내외 활동 거점

당시 활동 거점을 보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거점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데요. 독립 전쟁을 실현시키기 위한 군대를 양성하고자 만주 사령부를 일찍부터 설치한 것입니다. 길림(지린) 광복회의 만주 사령관은 단순한 지역 사령관이 아니라 대한광복회의 부사령관이기도 합니다.

초대 만주 사령관 이진룡이 체포되자 1917년 김좌진을 만주 사령관으로 파견하게 되는데요. 이로부터 김좌진의 만주 항일 무장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대구근대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는 '1910년대 광복을 꿈꾼 청년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박상진 의사가 대한광복회를 처음으로 결성한 지역이 어디일까요? 그 장소는 바로 대구 달성 공원이었습니다.

그럼 왜 하필 대구였을까요? 대구는 동서로 흐르는 금호강과 남북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만나 넓은 평야를 흐르는 지역입니다. 여기에 부산에서 서울로 이르는 영남대로가 지나가고 경부선이 달리는 교통이 요지이지요.

이러다 보니 예로부터 사람과 물산이 모이는 경상도의 행정, 경제 중심 도시였던 거지요. 당연히 일제강점기에도 경상도의 거점 도시로 많은 일본인들이 정착을 하였고 식민 통치기구도 하나둘씩 들어서고 이에 대한 반발로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시작으로 여러 항일 운동이 대구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항일 운동 흐름이 '대한광복회'의 결성까지 이어지게 되는 거지요.

대구근대역사관(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9호)

일제강점기 '조선식산은행'으로 사용된 대구근대역사관

이런 대구에서 마침 대한광복회를 조명하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한광복회의 활동 거점인 대구 원도심에서 말이죠. 특별전이 열리는 장소는 일제 강점기 '조선식산은행'으로 사용되었던 '대구근대역사관'입니다. 대구근대역사관은 1906년 '대구농공은행'으로, 1908년에는 '경상농공은행'으로 바뀌었고 1918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이 됩니다.

조선식산은행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수탈 기구로 전국 주요 지역에 지점을 설치하였습니다. 1932년 목조 건물을 헐고 지금의 석조 건물로 다시 지어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에는 한국산업은행 대구 지점으로 사용되다가 현재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사용 중입니다.

일제 강점기 대구 경찰서 앞 본정 거리

당시 대구경찰서와 상덕태상회를 재현한 모습

대한광복회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박상진 의사가 1912년 설립한 '상덕태상회'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박상진 의사가 양정의숙 동창생인 김덕기, 오혁태와 함께 각자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와 설립한 '상덕태상회'가 있던 자리가 대구근대역사관 인근 대구경찰서(현 대구중부경찰서) 앞이었습니다. 곡물 무역상이었던 상덕태상회는 사업을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하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는 비밀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대한광복회 설립 이후 전국에 여러 상회 역시 설립하는데요. 상덕태상회 위치가 놀라운 점은 경찰서 바로 앞이라는 점입니다. 경찰서 앞에 상회를 마련하여 경찰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리혀 경찰의 행동을 감시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대담함이 엿보이지요.

1915년 경북우편마차 사건

대한광복회의 행동 강령은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이었습니다. 이런 행동 강령을 보자면 비록 '회會'라는 온건한 명칭을 사용했지만 군대식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장차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체제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이런 행동 강령을 그대로 시행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경북우편마차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경북우편마차' 사건은 1915년 경부. 영덕. 영일군에서 일제가 징수한 세금을 경주 효현교에서 탈취한 사건입니다. 우재룡이 경주 효현교 일부를 파괴하고, 권영만이 우편마차 짐칸에 타서 세금 8,700원이 든 행랑을 탈취한 것이지요. 광복회가 벌인 거사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일제에게는 영구미제사건이라는 치욕을 안긴 사건이기도 합니다.

특별전 실내 모습

전국 곳곳의 친일파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던 대한광복회는 부호들의 신고가 이어지면서 경찰의 수사 대상이 됩니다. 1918년 1월 장두환을 필두로 2월 박상진, 이후 전국 지부 관계자 60여 명 정도 체포가 이어지면서 조직이 와해되기에 이르지요. 그럼에도 1910년대 광복회의 군자금 모집과 의협 투쟁은 19020년대 이후 의열활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경북 지역만으로 한정하더라도 1925년 경북 의열단 사건,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 사건 등으로 말이죠.

1918년 일제 경찰에 체포된 박상진 의사는 1920년 강도, 살인 제목으로 사형이 확정되었고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됩니다. 울산에서 태어났지만 어찌 보면 자신의 인생을 독립운동을 위해 마지막까지 불태우다 생을 마감한 장소가 대구인데요. 대구 지역에서 대구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에 비하면 그동안 너무나 소홀히 다뤄진 감이 없진 않았습니다만 지금이라도 이런 특별전을 만날 수 있기에 둘러보는 동안 고마운 맘이 들기도 했습니다.

대구근대역사관 특별전 '대구에서 만나자' (2023.06.09~2023.11.05)

"일제시대 때 호의호식하던 그분들이., 결국 많이 배운 그분 자식들이 광복 후에 권력에 가깝게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광복회 총사령 박모가 누군지 관심을 가질 리도 없었고 또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을 가질 그런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박중훈(박상진 증손자)

201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 시기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운동이 재조명되면서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 박상진 의사입니다. 하지만 박상진 의사를 다룬 2010년 KBS 역사 스페셜 제목이 '잊혀진 영웅,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인물인데요. 덥다 못해 뜨거운 8월이 가기 전, 광복을 꿈꾸며 조국을 위해 뜨겁게 살다간 삶을 한번 만나봐도 좋을 겁니다.

대구근대역사관 특별전 '대구에서 만나자-1910년대 광복을 꿈꾼 청년들'

- 기간: 2023. 06.09~11.05

- 관람시간: 09:00~18:00

- 휴관일: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매주 월요일(공휴일인 경우 그다음 날)

- 관람료: 무료

※ 해당 내용은 '울산광역시 블로그 기자단'의 원고로 울산광역시청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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