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용산리 분청사기 요지와 백허당 효자바위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연기(煙起) 마을입니다.

마을 앞으로 인천강(하류는 장연강)이 흐르고 뒤로는 소요산이 있어

말 그대로 배산임수형 명당인데요,

주변 산세가 용의 형세를 닮아 용산(龍山)이며,

지리산 화엄사와 연곡사를 창건한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한

연기사(烟起寺)가 있었고 선운산을 바라보고 있는

인천강에는 나루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을 이름은 연기 연(煙)을 사용하는데요,

아마도 연기제 아래에 있는 도요지와 관련 있는 듯싶습니다.

자기를 굽느라 늘 연기가 피어오른 역사가 있어

이에 마을도 아궁이에 불을 때며 만들어낸 모싯잎 송편과

콩나물밥 등 요리가 마을을 대표하는 요리로

2016년 고창군 내 10개 마을과 함께

식도락 마을로 지정되었는데요,

마을 입구가 온통 무궁화 꽃으로 가로수를 만들어

무궁화 꽃이 만발했습니다.

마을 지도를 보니 당산나무도 있고

보천교 차경석 교주 생가터, 용산리 고인돌, 용산리 분청사기 요지,

백허당(효자바위)가 있는데요,

오늘은 용산리 분청사기 요지와 백허당(효자바위)를 둘러봅니다.

마을 입구에서 연기제 방향으로 750m 정도 진행하면

제방으로 가는 길에서 저수지 아래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요,

150m 정도 들어가면 오늘 소개하는 효자 바위와 용산리 분청사기 요지가 나옵니다.

하지만, 잡풀이 우거져 용산리 분청사기 요지는 들어가 볼 수 없다는 점

미리 알려드립니다.

고창 연기 저수지는

소요산 계곡 등에서 흐르는 물을 가둔 저수지로

1969년 준공된 소류지(제방 길이 79m, 제방 높이 8.5m)를 37.6m 높이 댐으로 축조해

농경지 500ha에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2003년 준공한 저수지입니다.

소요산은 왼쪽에 있지만, 소요산을 가려면 오른쪽으로 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수지를 크게 한 바퀴 돌아야 하네요.

저수지에서 바라보니 효자 바위와 모정은 보이지만,

용산리 분청사기 요지는 잡풀에 가려 보이지가 않습니다.

위치는 정자 오른쪽으로 30m 정도 떨어진 경사면인데요,

들어가서 확인할 수 없음이 아쉽네요.

군수김하익백허당사적비와 국한문 혼용 번역비가 있는데요,

효자 바위 설명은 번역비를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효자 바위를 보기 전에 흥효정 정자를 봅니다.

오래된 정자는 아니고요,

효자 바위를 보러 오는 분들이 쉬어가는 정자입니다.

흥효정은 조선 중기의 이름난 효자

백허당 김하익(白虛堂 金夏翊,1633~1697)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고창군이 2003년 효자 사적비와 함께 세운 정자입니다.

내부에는 많은 기문이 있는데요,

정자가 생겼으니 현대의 시인들이 다녀가면서 남긴 시문입니다.

이제 효자 바위를 봅니다.

무더운 여름날 풀이 무성하게 자라 바위 윗면만 보이는데요,

받침돌도 있어 지석묘로도 보이는데,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아봅니다.

바위 한 면에 백허당(白虛堂)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었습니다.

백허당 김하익은 1666년 (현종 7) 과거에 급제해 안성 군수를 역임했는데요,

부친 김태하(金泰河, 1583~1649)와 조부 김언룡(金彦龍, 1562~ ?)까지

3대에 걸친 충신과 효자 집안입니다.

고창 흥덕 출신 김언룡은 1587년 부친상을 마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으며

선조 때 명나라 사신으로 가던 중 요동 벌판에서 도적떼를 만났지만,

당황하지 않고 꾸짖어 돌려보낸 일화로

명나라 황제가 충효당(忠孝堂)이라는 호를 내렸으며,

김태하는 열 살 때 어머니 병환이 위급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로서 병을 낫게 했고 왜란으로 부모님 식사 마련이 어렵자

하늘에 치성을 드려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하익은 17세 때 어느 추운 겨울날 안질로 고생하는 어머니께

의원이 잉어의 쓸개가 좋다는 말을 듣고 눈 덮인 장연강에

얼음을 깨고 하늘에 치성을 올렸는데,

거짓말처럼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 잉어를 손에 들고 집으로 가던 중 백호(白虎)를 만났다고 합니다.

마침 길을 가던 늙은 중이 김하익의 사연을 듣고

바위에 눈으로 백허당이라는 글씨를 쓰면 호랑이가 살려줄 것이라고 말하자

눈물로 백허당이라는 글씨를 썼는데요,

효심이 감복한 늙은 중은 백호를 타고 사라져 위기를 면하고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흘러 눈물로 쓴 글씨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후손들이 그 위에 백허당이라는 글씨를 새겨

선조의 효심을 후대에 널리 알리고 있는데요,

바위는 가로 8m에 높이 3m에 무게도 50t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크기여서 지석묘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 요지는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발굴된 유물은 가치도 상당하다는데요.

광주 무등산 충효동 분청사기 가마와 더불어 호남지역 15세기 후반

분청사기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가마라고 합니다.

2000년 시굴조사로 가마 4기 유물 퇴적층이 확인되었고

2001년 5월부터 8개월간 호남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4기의 가마 중 3기가 양호한 상태에서 발굴되었고

가마 번조실이 계단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가마 천장부가 남아 있는 등 귀중한 자료라고 하는데요,

출토된 분청사기 중 조화 및 박지 기법으로 제작된 물고기와

모란 무늬의 병, 편병, 대발, 대호, 접시 등 큰 특색이 있는 유물이 발굴돼

조선 전기 분청사기와 백자의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인정돼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고창에는 용산리 분청사기 요지 외에도 사적으로 시정된 도요지가 두 곳 있습니다.

아산면 용계리 청자 요지(사적), 부안면 수동리 분청사기 요지(사적)인데요,

그중 용계리 청자 요지는 전북특별자치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청자 가마터로

11세기 초 고려 전기 청자 가마터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아산면 반암리에서도 청자 요지가 발견되었고

고창에도 꽤 유명한 도예가들이 많아

그동안 청자 하면 강진과 부안만 떠올렸는데,

이제는 고창의 청자도 주목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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