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생가에서 시향(詩香)을

충분히 음미하고 나오니

오른편 돌담에 ‘금서당 가는 길’

이정표가 보입니다.

여기서 금서당까지 150m라면

가까운 거리인데요

그렇다면 ‘금서당’은 어떤 곳인지

함께 걸어 볼까요?

영랑생가에서 이어지는

‘감성 강진의 하룻길’!

이 길은 영랑 시인과

다산 선생이 오갔던 길인데요

아름다운 길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인지 길가에 잡초가

무성히 말라 있습니다.

금서당(琴書堂)에 왔어요!

금서당은 가정집처럼 생긴 고택인데요

금서당은 건립 당시 이 지방 선비들이

학문을 논하고 양반 자제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던 書堂(서당)이었다고 해요

금서당은 한 채지만 두 채가

각각 다른 모양으로 붙어있는데요

기존 한옥의 반은 살리고 소실된 반쪽은

벽돌로 붙여지어서 조금 언밸런스한

느낌은 드네요

서당이었던 금서당은

1905년에 사립금릉학교로 개칭되고

1909년 8월에는

강진공립보통학교로 개설되어

1914년 현재 해남 세무서

강진지서 객사로 이전하고

1926년에 강진읍 평동으로 이전하여

강진중앙초등학교가 되는데요.

그래서 지역민들은 금서당을 일컬어

강진 신교육의 발상지라고 부릅니다.

‘금릉학교 터’는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이곳에서 한말 교육 구국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고

1919년 4월 4일 강진읍

강진 만세시위에서도

지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영랑 김윤식 선생도 이곳 금서당 출신인데요.

3·1운동 때에 영랑은 1919년에

서울 휘문의숙 재학 중

독립선언문을 구두에 숨겨서

이곳으로 가져와

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남 최초·최대

강진 독립 만세운동의 산실입니다

강진 신교육의 요람인 '금서당'은

한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으나,

1950년 이후 완향 김영렬 화백이

매입하여 관리해왔는데요

2003년 김영렬 화백이 작고한 뒤에는

부인 박영숙 여사가 완향의 작품을

보관하며 전시하고 있습니다.

1923년 강진에서 출생한 완향 선생은

이곳 금서당에서 그림과 서예, 서각 등

예술작업에 몰두하는데요

미술교사로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열정은 다했던 완향은 누구보다도

고향을 사랑했고

그래서 강진의 자연을 즐겨 그렸다고 해요

완향 김영렬 선생은 서예와

서각에까지 일가견이 있었는데요

금서당 곳곳에 걸린 서각은

모두 선생의 작품이라고 해요

‘경천숭지애인(敬天崇地愛人)이라는

현판 보이시죠?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숭배하며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인데요

이 현판도 완향 김영렬 화백의

작품이라고 해요

금서당 앞마당은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는데요.

강진의 진산으로 선인봉

중턱에 호젓한 곳이라

강진 읍내가 한눈에 조망됩니다

날이 추워질수록 겨울답사 1번지

강진을 찾는 사람이 많으실 텐데요.

금서당 주변에는 영랑생가와

시문학파기념관,

사의재, 금곡사, 고성사 등의 명소가 많으니

꼭 들려서 역사의 향기도 느끼고

작품들도 감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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