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시간 전
울산 출신 첫 연예인,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 음악관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울산광역시 공식 블로그 기자단입니다.
울산 중구 중앙 1길 및 새즈믄해거리 일대에 조성된 고복수길을 따라 걷다 보면 복고 감성으로 무장한 낡은 건물과 오래된 골목이 등장합니다.
그곳에 바로 오래된 가정집을 개조하여 꾸며진, 고복수 음악관이 있습니다.
울산 출신 대중가요 선구자 고복수의 이름을 딴 '고복수 음악관'은 그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입니다.
음악관 안에는 개회가 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요.
그의 유품은 찾아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는데요.
지난해 기준 연간 1만 913명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될 정도라고 하는데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방문을 해보셨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들기도 합니다.
개관 시간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새해 첫날, 명절 당일은 휴관일이니 방문 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울산 태생의 음악가 고복수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지난 2018년 12월 건립된 기념관으로, 연면적 125,62㎡, 지상 2층 규모로 되어있어요.
중구청이 총 9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1980년대 지어진 2층 양옥 주택을 매입하여 리모델링했습니다.
울산 중구의 대표 관광 명소 가운데 하나인 고복수 음악관에서 고복수 선생의 생애 및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답니다.
1층은 전시공간, 2층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타향살이'로 유명한 울산 출신 고복수 선생과 부인 황금심 여사의 생애와 그의 작품, 대표곡도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개화기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축음기, 피아노 등의 소품과 인테리어로 꾸며 레트로풍 감성 사진을 찍기에도 안성맞춤입니다.
울산에서는 한국 가요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고복수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한국 대중가요 발전을 위하여 매년 고복수 가요제를 개최하고 있을 정도이니 꼭 한 번쯤 방문해 보시길 추천해요.
문화해설사님의 도움으로 고복수 선생의 '타향살이'를 첫 음반 발매 당시 그대로 직접 들어볼 수 있었어요.
그동안 1934년 발매된 '타향살이' 유성기 음반은 음질과 상태가 양호한 것이 남아있지 않아 유성기(레코드 재생 기계)로 듣는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중구는 지역의 대표 가수인 고복수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복각을 추진, 울산음악창작소를 통하여 국내 국악과 고음반 애호가로 유명한 정창관 평론가(한국고음반 연구회 부회장)와 공동으로 1년간의 사전 준비와 제작 기간을 거쳐 복각에 성공했어요.
정창관 평론가는 국내 유성기 음반 수집가들을 수소문해 희귀 원본 1점을 확보했고, 여기서 음원을 추출하여 복원 전문 녹음실에서 복원을 진행했습니다.
이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성기 음반 복각이 가능한 영국 벌컨 레코드사에 보내서 수십 장을 복각했어요.
당시 가사가 들어있는 내용물까지 완벽하게 재현해 낸 국내 최초의 유성기 복원 작업으로, 고음반 수집가들 사이에서 관련 자료에 대한 확인과 문의가 이어지고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북간도와 만주 등 낯선 이국땅으로 떠난 이들의 한을 달래주었던 가수 고복수는 울산 출신의 첫 연예인이자 엔터테이너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한참 인기를 누리던 시기 일제의 군국가요 취입 강요를 피하기 위하여 만주와 현중국 동북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민족애를 실천했고 이후 영화제작과 예술 학원 설립 등 활발한 활동을 통하여 한국 가요계의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고복수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플레이어와 헤드 스피커도 마련되어 있어 다양한 시각에서 관람이 가능합니다.
1932년 콜롬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한 '전선 9대 도시 가요 콩쿠르'에서 3위를 차지했어요.
당시 심사는 홍난파, 현제명, 안기영 등 당대의 쟁쟁한 음악인들이었다고 해요.
이후 계약금 1,000원과 월급 80원에 OK 레코드사와 전속계약하게 됩니다.
1934년 22세 때 '타향'(현재 타향살이)를 시작으로 '이원애곡', '사막의 한', '짝사랑' 등을 잇따라 히트 시키면서 국민가수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타향살이'가 실린 앨범은 발매 1개월 만에 5만 장이 팔렸을 정도로 큰 인기였습니다.
어린 시절 교회 선교사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을 배우며 근·현대 서양음악을 접했고, 1932년 전국 신인가수 선발 대회에 3위로 입상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후 그의 가수 활동과 부인 황금심과의 일화는 한국 가요사의 중요한 역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는 국내뿐만 아니라 간도와 만주, 일본 등의 한인사회로도 급속히 퍼져나갔다고 하죠.
일제에 강제 동원되었던 노동자들에게도 나라를 잃고 살아가야 하는 '망국의 한'을 노래한 것이자 고향을 그리워한 망향가였던 셈이었어요.
고복수 음악관 2층 전시실에서는 중구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볼 수 있도록 꾸몄어요.
'종갓집 중구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1960년대~2020년대 울산 중구의 풍경과 변화상을 기록한 중구 근현대 사진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고복수 선생의 생애 및 작품 세계와 더불어 지역의 변화상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니 아주 유익했답니다.
실제 생가가 아닌 장소에 조성된 데다 유품도 거의 전시되어 있지 않아 상징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고 하는데요.
현실적인 제약들이 있기에 기념관 이전이 쉽지는 않은 상황이라고 합니다.
고복수 음악관으로 향하는 골목길 및 바닥 등 보수가 필요한 인근 구간은 하반기 예산을 활용하여 정비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니까요.
앞으로도 이곳에 많은 관심과 방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해당 내용은 '울산광역시 블로그 기자단'의 원고로 울산광역시청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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