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기 울산 중구 소셜미디어 기자단 오 준 서입니다.

오늘의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우리 블로그를 통해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께 질문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울산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그 중에서도 울산 중구하면 생각나는 인물은 또한 누구입니까?

우리 블로그를 통해 여러 블로그기자님들께서 울산 중구의 좋은 곳들을 소개하면서 울산의 인물에 관한 혹은 울산 중구 출신의 인물들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 여정을 담은 글들이 간혹 올라오지 않습니까.

고복수, 서덕출, 최현배 등 저 역시나 이러한 활동을 계기로 울산 중구하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제법 생겨났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한글이 목숨’이라는 멋진 말을 남기셨으며 우리의 언어로 사용하는 한글의 역사와 우리가 함께 둘러보고 있는 울산 중구의 역사이신 외솔 최현배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외솔기념관’에 다녀온 이야기들 한 번 들려드릴게요.

따라오시죠!

울산시내버스 이용하여

외솔기념관 찾아가기

○ 병영1동행정복지센터(병영사거리 방면, 40503)

- 132, 203, 205, 225, 226, 233, 235, 246, 256, 266, 402, 412, 421, 432, 442, 453, 701, 714, 913번

○ 병영사거리(북울산전화국 방면, 40505)

- 132, 203, 205, 225, 226, 233, 235, 246, 256, 266, 402, 412, 421, 432, 442, 453, 701, 714, 1127, 1147, 5003번

○ 병영사거리(중부경찰서 방면, 40506)

- 132, 203, 205, 225, 226, 233, 235, 246, 256, 266, 402, 412, 421, 432, 442, 453, 701, 714, 912, 913, 1127, 1147, 5003번

위 버스정보는 외솔기념관을 쉽게 찾아갈 수 있거나 혹은 대체로 많은 버스 노선들이 정차하는 노선들을 중심으로 정리한 내용으로 외솔기념관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버스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 병영초등학교입구(병영성 방면, 24904)

- 외솔기념관에서 151m

- 912, 942번

- 외솔기념관으로 진입하는 골목 바로 앞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으로 병영사거리 또는 병영시장 방면에서 올라오는 교통편으로 장현동 골드클래스나 북구 동산으로 향하는 지선버스가 정차합니다.

○ 병영초등학교입구(제니유치원 방면, 24903)

- 외솔기념관에서 159m

- 912, 942번

- 외솔기념관으로 진입하는 골목 건너편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으로 장현동 골드클래스나 북구 동산에서 출발하는 지선버스를 이용해 병영사거리 또는 병영시장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데 이용하기에 편리합니다.

외솔기념관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할 당시 우리 말과 글을 지킨 독립운동가이자 평생을 한글의 보급과 정보화를 위하여 애쓰신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이하, 외솔 선생)을 기리며 외솔 선생의 업적과 한글을 사랑하셨던 그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지난 2010년 개관한 곳입니다.

외솔기념관은 외솔 선생의 업적을 소개하며 외솔 선생이 쓴 저서와 직접 입으셨던 의복 등의 유품을 전시해놓고 있으며 외솔 선생의 한글 사랑 정신을 후세에 알리고 있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 되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외솔기념관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12길 15

052-290-4828

www.junggu.ulsan.kr/oesol

  • 관람시간 :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명절 당일

  • 관람료 : 무료

우선 먼저 외솔기념관에 오시면 ‘한글실’을 먼저 둘러보실 수 있는데요.

외솔기념관 한글실에는 오래된 고목의 책장에 이곳 외솔기념관과 부합하는 우리 말과 글에 관한 장서들이 배가되어 있으며 누구나 와서 책을 읽고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울 수 있는 탁자와 의자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아주 오래 전에 백인 흑백 사진 속 어릴 적 외솔 선생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고 특히나 눈에 띄었던 것은 누군가 이곳에 다녀가며 남긴 여러 다양한 스타일의 글들이 쓰여 진 원고지와 메모지 등 외솔기념관에 오면 절로 한글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외솔기념관에도 외솔기념관만의, 외솔기념관 나름의 굿즈가 만들어진 것 같았습니다. 외솔 선생께서 남기신 멋진 말, ‘한글이 목숨’이 쓰여져 있고 외솔 선생 특유의 흰 머리와 의복 그리고 외솔 선생이 쓰신 ‘우리말본’ 원본으로 보이는 장서 한 권이 그려져 있는 메모지인데요.

정말 어디서 판매라도 하면 당장 구매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 정도로 탐이 났었답니다 :D

외솔기념관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외솔 선생의, 외솔 선생에 의한, 외솔 선생을 위한 메모지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답니다.

외솔 선생은 울산 중구 출신이십니다.

우리 말과 글을 목숨처럼 생각하시며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치신 독립운동가이시자 연구가이시면 겨레의 스승으로 칭송받고 있는 위대한 분이기도 합니다.

외솔 선생은 우리 말과 글에 ‘민족의 정체성’이 있다는 신념으로 일제강점기에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에 앞장 서셨고 우리 말을 연구하시면서 문법 체계를 확립하고 특히 우리 말 사전을 편찬하시는데 크게 기여하신 인물입니다.

우리가 지금 한글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더불어 우리가 지금 이 블로그를 통해서 사진과 글로서 함께할 수 있었던 것 역시나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연구하신 외솔 선생의 노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외솔 선생을 한 번 만나 뵈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한글하면 떠오르는 분이 한 분 더 계시죠. 바로 주시경 선생 이십니다. 지금 이 글을 통해서 만나보고 있는 외솔 선생은 주시경 선생의 수제자였다고 합니다.

외솔 선생은 국어연구학회가 설립한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1911년 조선어강습원 고등과 1회 졸업생 가운데 성적이 아주 우수했으며 이를 통해 국어연구학회 특별회원이 되는 등 외솔 선생이 한 평생 한글독립운동에 바친 계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참고로 외솔 선생의 동생이신 최현구라는 인물 역시나 1919년 4월 울산 병영 3.1 독립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로 독립운동을 하시다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으며 그 이후로도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하는 도중 사망했다 전해집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외솔 선생은 경성고등보통학교(이하, 고보)를 졸업한 졸업생들 가운데 유일하게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 당시 관비 유학생은 유학이 끝나면 관립학교에서 근무를 해야만 했던 규정이 있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또한 일제 식민정책을 따라야 했기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동래고보에서 우리말을 가르치게 됩니다.

외솔 선생은 동래고보에서 수업이 없는 날에도 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우리 말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학생들에게 우리 말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만든 교재가 만들어지는 데 이 때 만든 교재가 바로 ‘우리말본’이라는 책입니다.

그렇게 동래고보에서 생활하다 다시 유학길에 오른 외솔 선생은 교토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교육학을 전공했고 ‘페스탈로치’에 감명을 받은 외솔 선생은 조선의 페스탈로치가 되어보고자 했던 포부를 가지고 정진하며 교토대학에서 4년, 추가로 대학원에서 1년 동안 연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한 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이제 조선말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 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적의 끼침이다.

그러므로, 조선말의 말본을 닦아서 그 이치를 밝히며, 그 법칙을 드러내며,

그 온전한 체계를 세우는 것은, 다만 앞사람의 끼친 업적을 받아 이음이 될 뿐 아니라,

나아가 계계승승할 뒷사람의 영원한 창조활동의 바른 길을 닦음이 되며,

찬란한 문화 건설의 터전을 마련함이 되는 것이다.

외솔 최현배, 『우리말본』 머리말

유학생활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외솔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우리말본’의 저술활동을 이어갔으며 조선어학회 활동 또한 시작합니다.

또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 및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하시며 한글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에도 큰 역할을 하셨답니다.

외솔 선생은 1926년 항일민족주의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지만 내부 분열로 인하여 이 단체의 결속력은 오래가지 못했고 활동 정치의 상태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이 발생합니다.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던 일제는 민족주의 단체들을 검거하기 시작했고 흥업구락부 회원들 역시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흥업구락부는 해체되었고 핵심인물들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협력하기까지 했으며 이에 외솔 선생은 일제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회유에 넘어가지 않으셨고 이로 인하여 연희전문 교수직에서 강제로 물러나야 하는 등의 불이익을 받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임하면서 교과서 편찬 기본 방향을 수립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편수국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여태 연구하신 내용들을 국가 정책으로 실현해 나가기도 했습니다.

교과서는 모두 한글 전용으로 가로 체제로 바꾸는 등 교과서가 아닌 일반 출판물도 한글만을 쓰며 가로 체제를 따르게 되는데 이는 모두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얻어 사전 편찬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게 되는데 이 덕분에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이 ‘조선말 큰사전’으로 결실을 맺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어 한글 기계화를 통해 우리 말에 쓰이는 글과 낱말의 사용빈도를 파악해 타자기 자판을 완성하는 등 다방면으로 외솔 선생의 손길이 닿은 덕분에 한자어와 일본어는 점차 우리 말과 글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 말은 우리 겨레가 반만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성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조선말)큰사전』머리말 가운데

외솔 선생의 많고 많은 업적들 가운데 저는 이것 만큼은 꼭 강조해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외솔 선생은 한글 기계화의 선구자이십니다.

외솔 선생은 다가올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대비하여 한글의 기계화에도 큰 공을 들이셨는데 외솔 선생께서 오랜 시간 연구했던 한글 가로풀어쓰기와도 연관 깊은 한글의 기계화는 글자판 통일을 위해 한글학회 부속기관이었던 한글 기계화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시며 한글 자판 배열의 기준을 확립하고 타자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글 기계화의 촉진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이후 회사나 군 부대, 학교 및 공공기관 등에 한글 타자기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그 당시의 한글 타자기는 점차 발전하여 지금의 컴퓨터 키보드와 스마트폰의 자판으로도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도록 편리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외솔 선생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블로그를 통해 이렇게 열심히 알려드린 정성을 보아서라도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한글의 대중화에 앞장선 주시경 선생, 북한의 국어문법을 세운 김두봉,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외솔 선생의 연구를 이어간 제자 허웅 님과 함께 한글의 역사, 울산 중구의 역사이신 ‘한글이 목숨’ 외솔 선생을 우리 모두는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외솔기념관에는 외솔 선생이 생전에 착용하셨던 두루마기와 검정 모직 코드, 트렌치코드 등 외솔 선생의 의복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 외솔 선생의 두루마기 한 점이 외솔기념관 상설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외솔 선생의 의복들은 외솔 선생이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에 중요한 인물인 점에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국가 등록문화재로도 지정된 바 있습니다.

많고 많은 위대한 업적이 있으시니 국가에서 수여하는 훈장도 많이 있으셨는데요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하사한 건국공로훈장증도 외솔기념관 상설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으니 꼭 한 번 살펴보시길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외솔 선생은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사랑 만큼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 또한 깊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텃밭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면 손주들을 불러 함께 시간을 보냈으며 직접 편지를 써 애틋한 마음을 전하는 다정한 면모도 계셨는데요.

이처럼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외솔 선생을 직접 뵙거나 경험해보진 않았으나 외솔기념관에 와서 외솔 선생을 기억하듯 떠나신 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리고 좀 더 많아진다면 외솔 선생의 삶과 그 위대한 업적 또한 이곳 외솔기념관에서 영원히 기억되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꽃이 예쁘게 피려면 물도 주고

정성껏 가꿔야 한다.

우리말과 글을 가다듬는데도

정성이 필요하다

한글이 목숨

외솔기념관에서 벗어나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오시면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된 외솔 최현배선생 생가터(이하, 생가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생가는 이미 없어지고 지난 2008년에 복원되어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는 생가터는 외솔 선생께서 태어나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서울의 경기중고등학교로 진학하실 때 까지 이곳에서 사셨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연출하고 있으며 생가터 한 켠에는 이곳을 방문하는 어린이 방문객들을 위한 전통놀이 체험시설까지 갖추고 있으니 한글의 역사, 울산 중구의 역사이신 한글을 사랑한 외솔 선생에 대한 공부도 하고 생가터로 올라와 재밌는 전통놀이 체험까지 한다면 정말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을 빌어 지금 우리 모두의 생활을 가능케 한 외솔 선생의 숨은 노력과 위대한 업적에 깊이 감사드리며 후세대인 우리가 외솔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보존하기 위해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금도 외솔기념관에서는 평생을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애쓰신 외솔 선생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오셔야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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