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작품이나 유물을 보관하는 공간입니다.

대전시립미술관은 이 기능을 넘어, 시민들과 예술이 더욱 가까워질 수 있도록 열린수장고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장 중인 작품들을 공개해 별도의 기획 전시 형식으로 선보이는 방식입니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작품에 담긴 흐름과 의미를 더욱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으며, 예술을 보다 친숙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열린수장고 내부에서는 두 가지 전시가 함께 열리고 있었으며,

그중 하나는 《DMA 소장품 하이라이트 2025 : 흔적》입니다.

사진, 드로잉, 판화라는 세 가지 매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시간과 기억, 변화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어떻게 담아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임동식 작가의 드로잉 연작 〈불제자 소년〉(1961)은 작가가 고등학교 시절 절에서 만난 또래 스님의 이야기를 담은 13점의 그림입니다.

어린 스님의 수행과 맑은 마음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민을 조용히 전하며,

그림 속에는 작가의 진지한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손아유 작가의 작품은 점과 선, 색으로 이루어진 화면 위에서 작가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은 점 하나는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며, 선은 흐름과 확장을 상징합니다.

감각적인 색채는 감정을 전달하며, 재일 작가로서의 정체성 혼란과 치유 과정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임영균 작가의 〈백남준의 기억 시리즈〉(1982–2006)는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예술과 삶을 기록한 사진 연작입니다.

실험 공연과 회고전, 백남준 선생의 생애 마지막까지 담긴 사진 속에는 한 시대를 이끈 예술가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작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깊이 있는 시선이 작품 전체에 녹아 있습니다.

박불똥 작가의 〈Load 1(망치)〉는 1980년대 민중미술의 강한 메시지를 퍼포먼스와 오브제를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무거운 사회 현실과 갈등, 그 안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행동을 담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시대와 매체, 표현 방식 속에서도 ‘흔적’이라는 주제 아래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관람객은 단순한 진열이 아닌, 의미 있는 흐름 속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백남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프랙탈 거북선〉도 만날 수 있습니다.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를 기념해 제작된 이 작품은 309대의 CRT 모니터로 구성된 거북선 형태의 대형 미디어아트입니다.

각 모니터에서는 또 다른 거북선 이미지가 재생되며, 프랙탈이라는 반복 구조 속에서 순환과 느림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프랙탈 거북선〉은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느림의 의미를 되짚게 하며, 전통과 기술의 만남을 예술적으로 표현합니다.

특히 이 작품은 하루에 단 2시간,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만 작동하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더욱 특별한 장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열린수장고의 또 다른 전시는 대전 출신 원로 작가 유근영의 <엉뚱한 자연>입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를 아우르며, 유근영 작가가 오랜 시간 쌓아온 예술적 시선을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48년 대전에서 태어난 유근영 작가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대전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지역 미술계에 꾸준한 관심을 갖고 활동을 이어왔으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꾸준히 만들어왔습니다.

전시에는 미술관이 소장 중인 〈우주적 공간〉(1987)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초기 연작 중 하나로, 반복되는 빗금 무늬가 장식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복잡한 화면 구성을 통해 추상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1970년대 후반 신농백초(神農百草)라는 고사를 접하며 새로운 작업 방향을 정립하게 됩니다.

이 표현은 고대 중국에서 다양한 풀을 직접 맛보며 식용과 약용을 구분했다는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유근영 작가에게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실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연작〈엉뚱한 자연〉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초기에는 추상적인 패턴 중심이었지만 점차 발전하며 풍경화와 정물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양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작품 속에는 자연의 에너지와 생명력이 담겨 있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익숙한 자연을 새롭고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유근영 작가의 세계는 단순한 자연 묘사를 넘어, 자연 안에 살아 있는 흐름과 감각,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감정을 고유한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현재도 활발히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의 깊이 있는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줍니다.

대전시립미술관의 열린수장고는 단순한 보관 창고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시민과 소통하고자 하는 열린 공간입니다.

다양한 매체와 시선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관람객이 예술에 보다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소장품이라는 이름으로 잠자고 있던 작품들이 새롭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 너머에 담긴 이야기, 다양한 흔적과 색채, 느림과 생명력, 그리고 시대의 변화까지.

열린수장고는 예술을 일상 속에서 느끼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위치: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 155

운영시간: 화~ 일 10:00-18:00

이용문의: 042-270-7343

관람방식: 자유 관람 가능, 별도 예약 없이 입장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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