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시간

편안할 영(寧)과 넘을 월(越)

산과 계곡의 절경은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몸을 담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지켜보는 풍경으로서 산과 계곡의 아름다움은 역시 가을이 최고다. 영월은 여름 휴가철에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러 찾는 지역이다 보니, 요즘처럼 바람이 쌀쌀해지면 산과 계곡은 한산하게 물 흐르는 소리와 야생 동물 소리만 울려 퍼진다. 생명력과 활기 넘치던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고요히 숨 고르는 자연의 소리만 남은 산과 계곡.

사진 속 계곡은 영월의 엄둔 계곡이다. 영월은 사실 이름이 알려진 계곡이 꽤나 많은데, 그중 가장 익숙하게 들은 이름이 법흥 계곡과 김삿갓 계곡일 것이다. 이외에도 이끼 계곡, 연하 계곡, 내리 계곡 등이 있는데, 이곳 엄둔 계곡은 아는 사람들만 찾아가는 명소다. 개인적으로 나는 엄둔 계곡이 영월의 수많은 계곡들 중에서 가장 독특한 분위기와 풍경이 있는 계곡이라 생각한다. 며칠 전 근처에 볼일이 있어 돌아오는 길에 생각나 오랜만에 잠시 들렀는데, 역시나 가을 풍경이 진국이다.

산과 계곡을 찾아가기 어렵다면, 읍내에도 충분히 영월의 가을을 만끽할 만한 곳이 많다. 장릉과 보덕사, 금강공원과 관풍헌 은행나무, 봉래산은 말할 것도 없다. 아, 요즘 한창 미디어에서 만나볼 수 있는 반가운 모운동 마을과 운탄고도 트레킹 코스는 가을 풍경을 꼭 봐야한다. 가을은 봄만큼이나 짧게 지나가기 때문에 서둘러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절경 시기를 맞추는 게 쉽지 않다 보니 우연히라도 지나칠 때마다 틈틈이 살펴봐야 한다. 짧아서 더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다운 건 모두 짧게만 만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계곡 아래에서 가만히 앉아 물멍, 물소리멍을 하고 있자니 그간 잘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며 쌓고 있던 내면의 울분들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울화와 욕심. 그러니까 아무리 시골에 내려와 유유자적하며 산다고 해도 신선의 마음이 되지 않는 이상, 결국엔 사람과 돈의 관계에서 쌓일 수밖에 없는 오물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부정적인 감정과 마음들이 스르르 녹는 기분이라는 의미다. 조금이나마 더 큰 이익을 위해 부렸던 욕심, 그로 인해 발생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흐르는 물소리에 씻겨 내려가는 정화의 시간. 짬을 내서 들르길 잘했다는 생각으로 계곡을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그동안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문제들에 대해 ‘그래, 양보하자.’라거나 ‘그래, 내려놓자.’라는 결심이 들며 마음이 안도되었다.

역시, 이래서 자연으로 향하는가? 하는 깨달음 비슷한 게 떠올랐다. 산속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유명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다들 큰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가을, 이제 또 금방 지나갈 이 아름다운 계절이 존재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정화의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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