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기념물 제77호 이상설 생가는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 선생의 생가로 안채와 헛간채로 구성된 소박한 초가집입니다.

이상설 선생이 태어나 7살까지 살았던 곳으로 40여 년 전 폐허가 되어 무너져 버린 것을 복원한 것으로, 가옥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흙벽돌과 진흙으로 지은 초가 두 채입니다.

이상설 선생의 생가에는 초가 두 채, 숭열사 중심으로 이상설 동상, 기념비, 그리고 유적 기념관이 있습니다.

항일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선생의 기념관이 고향 주민들의 모금활동 등을 통해 새로 짓고 있으며, 새 기념관엔 전시관과 교육관, 강당이 들어설 예정이라 기대가 큽니다.

홍살문을 들어갑니다.

계단 위 내삼문 안에 있는 숭열사는 이상설 선생의 존영을 모신 사당입니다. 이상설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해마다 추모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설 선생의 업적과 기록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전시관에는 많은 유물이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이상설 선생과 같은 수많은 선조들의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다시금 찬란한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기념관을 통해 선생의 다양한 업적을 보면서 새삼 삶에 감사하고, 나라를 위한 희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자녀들과 함께 관람한다면 좀 더 조국에 대한 뜨거운 선조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907년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은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 유럽 각국을 걸쳐 미국에까지 가서 일본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근대 수학 교과서 '산술신서(算術新書)'를 집필해 수학 교육의 아버지로도 불렸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며 민족교육에 앞장서다 1917년 병을 얻어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47세였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나의 유품과 시신을 모두 불태워 그 재를 날려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유언조차 맘이 아립니다.

일평생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살다 간 위대한 위인, 이상설 선생.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업적을 잊지 않고 조국을 위한 그들의 뜻을 새겨감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숙제입니다.

이상설선생 생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이상설안길 10

관람시간 : 10:00 ~ 18:00

휴관 : 월요일 휴관 / 1월 1일, 설날, 추석 연휴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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