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영화관

솔향강릉

2023년

여름


극장은 고달픈 삶 견디게 해준 행복한 천국

강릉 영화관의 역사

그는 환상 때문에 행복하게 견딜 수 있었던 거예요

“그는 환상 때문에 행복하게 견딜 수 있었던 거예요.”

영화〈시네마천국〉에 나오는 대사다. 옛 극장들을 추억하다 보니 갑자기 이 대사가 떠오른다. 정말 그랬나 싶다.

극장은 문화공간이자 이야기의 공간이다. 역사가 그렇듯 오래된 공간에는 수많은 사람과 사연이 있다. 누군가는 거기서 연애를 했을 거고 누군가는 고달픈 날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그와 같은 삶의 애환을 담은 강릉의 극장 역사를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변천사를 찾아가 본다. (편집자 주)

극장의 역사와 얽힌 옛이야기

예나 지금이나 극장은 우리에게 천국이다. 꼭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극장 안에서 우리는 웃고 울고 행복해한다. 즐길 거리가 없던 옛이야기만은 아니다. 인터넷에, 게임에, 스마트폰에 온갖 오락거리가 넘쳐나는 지금도 1천만 관객을 훌쩍 넘는 영화들이 태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1960~1970년대 춥고 배고픈, 가난했던 시절에는 더 그랬다. 아베크족들이 남몰래 손깍지를 끼기 위해 가던 유일한 데이트 코스였고, 설이나 추석 등 명절에는 90분 내내 서서 보는 것도 큰 위안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누구든 한동안 신성일과 문희, 윤정희, 남정임과의 로맨스, 신영균과 박노식, 최무룡 등의 주먹세계에서 승부의 주인공이 되었던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즐겨 찾던 극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천국은 다 사라져 역사 속에 추억만 남고 멀티플렉스 하나만 덜렁 남았다.

1956년 강릉극장이 처음 세워진 이후 1980년대 후반에는 무려 10개까지 늘어났던 그 많았던 극장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와 함께 가슴 아린 추억도 다 사라졌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중반 강릉, 시민관, 동명, 신영극장 개관

강릉에 세워진 최초의 극장은 1956년 2월 1일에 문을 연 강릉극장이다.

강원도에서도 최초였다. 가마니 깔고 보던 이동 영화관이 가끔 왔다 가던 지방에 번듯한 극장이 문을 열었으니 강릉사람들에게는 천지개벽할 사건이었다.

초창기에는 시골 벽지에서 농사짓던 사람들도 추수가 끝나면 단체로 구경 올 정도로 인기였다. 주로 외화를 상영하면서 나름 서양 문물의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1991년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현재 극장 건물은, 앞에는 상가가 있고, 그 뒤쪽으로 남아있다.

강릉의 두 번째 극장은 1961년 3월 1일 문을 연 시민관이다.

박 모 사장(성명 미상)이 세웠다고 한다. 박 사장은 지금 월화거리 공용주차장 자리에 ‘재생관’이라는 극장을 잠시 열었다가 성내동 옛 우체국 자리(지금 강릉 대도호부 관아 입구)에 시민관을 개관했다.

시민관에서는 영화 상영 외에도 인기가수, 코미디언들의 공연이 자주 열렸다. 특히, 남진 나훈아 쇼라도 있는 날이면 성내동 일대가 누이들의 분 냄새로 진동했다. 그런 날이면 영화 간판 대신 가수와 쇼 무희들이 그려진 화려한 간판이 내걸렸고 시민관 무대는 깜짝 놀랄 만큼 야한 옷을 입은 댄서들로 후끈 달아오르곤 했다.

시민관은 1980년대 초 옛 시청 앞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1979년 4월 문을 닫았다.

강릉의 세 번째 극장은 1965년 9월 10일 문을 연 동명극장이다.

동명극장은 원래 강릉중학교가 있었던 자리다. 1951년 강릉중학교가 입암동으로 이전한 후 극장이 세워졌다. 창업자는 심종수 씨다. 이미 한참 전에 돌아가셨고 극장도 리버사이드 나이트클럽을 거쳐 현재 실내 골프연습장으로 변했다.

강릉사람들은 동명극장에 관한 추억을 대부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싼값에 영화 두 편씩 보여주니 학생들이 많이 찾았다. 특히 강릉 날라리(?)들의 천국이었다. 원래는 개봉관이었다가 1972년 〈대부〉 상영 이후 재개봉관으로 바꾸었다. 영화는 대박이 났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오히려 손해를 보자 당시 극장계의 관행인 보증금 제도가 없는 재개봉관으로 전환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을 상영하기 위해 간판을 걸었을 땐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택시부 광장까지 줄을 섰고, 당대 인기가수들의 리사이틀이 철철이 열리곤 했지만 결국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1996년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강릉의 네 번째 극장은 1965년 11월 1일 문을 연 신영극장이다.

동명극장 개관에 이어 2개월 후 문을 연 신영극장은 최종승 씨가 극장주였다. 극장 규모가 다른 극장과 비교해 꽤 컸다. 그래서 학교 학예발표회나 공무원 교육장 등으로도 많이 이용되기도 했다.

신영극장은 1990년 강릉에 내린 기록적인 폭설 때 쌓인 눈을 이기지 못하고 지붕이 무너졌다.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방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지나다니는 사람의 발이 보일 정도였다. 그때 강릉상고 체육관, 안목 롤러스케이트장 등도 무너졌다.

최종승 씨는 1991년 9월 무너진 신영극장 자리에 쌍둥이 건물을 올린 뒤 신영 1·2관을 오픈해서 제2의 전성기를 열었지만, 멀티플렉스의 위세에 밀려 2009년 폐관하고 말았다. 하지만 2012년 ‘독립예술극장 신영’으로 재개관해 강릉의 독립영화 애호가들의 성지 노릇을 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문화극장·중앙극장·동부극장 등 10개 관 성업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문화 관련 규제들이 대폭 풀리면서 강릉에도 극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옥천동 옥천예식장 2층의 문화극장, 선플라자 빌딩의 선플라자 극장, 오거리 삼성생명 옆 중앙극장, 동부시장 ‘동부 카바레’ 자리에 동부극장, 옛 시외버스 터미널 바로 옆(옛 성도회관 2층)의 씨네 아트홀, 임당동 롯데리아극장 등 6곳이 그때 한꺼번에 생긴 극장들이다.

롯데리아극장(전 경일소극장: 1986년 4월)은 전기와 후기로 나눠야 한다. 전기는 롯데리아 빌딩이 들어서기 전 단층 건물의 쑥 들어간 뒤쪽에 있었다. 예술의 탈을 쓴 유럽 에로영화가 많이 걸렸다. 이후 롯데리아 빌딩이 들어선 후에는 좌석과 스크린과 음향을 갖추며 강릉 최고의 극장으로 자랑했다.

플라자극장(1988년)은 지금의 선플라자 빌딩이 건립되면서 극장도 들어섰다. 하지만 극장 바로 위층에 나이트클럽이 있어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해서 쿵쿵거리는 클럽의 소음을 견뎌야 했다.

문화극장(1988년 9월)은 좌석 경사가 커 앞자리에 키 큰 사람이 앉아도 스크린이 잘 보였다. 이곳도 강릉 최초의 고급 전문 음향시설을 자랑했다.

동부극장(1989년 3월)은 서울의 낙원극장처럼 동성애자들이 주로 찾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소문일 뿐 막상 가서 본 사람은 그렇지는 않았다고 한다.

씨네 아트홀(1989년 7월)은 늘 사람이 없었다.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제법 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극장주의 예상과는 완전히 어긋난 극장이 되고 말았다.

중앙극장(1989년 10월)은 1, 2관으로 나눠 있었는데 좌석 경사가 너무 낮았다. 이 때문에 영화 한 편 보고 나면 목이 아프고 두통이 오곤 했다고 한다.

강릉 시내 10여 개나 되던 극장들은 1980~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하나둘 안타깝게도 비디오 산업의 발달과 멀티플렉스 개관에 밀려 문을 닫고 말았다.

낡은 스크린, 2단으로 된 객석과 매표소, 영사기 부품과 램프 등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흔적들. 고달픈 삶을 달래준 우리의 천국, 극장은 역사와 추억만 남기고 모진 세월과 함께 아련히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엔 ‘달달한’ 팝콘과 코카콜라, 극장표 자판기가 들어섰다.

글/최종일 편집위원 사진/김학주 명예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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